깨달음과 관계없는 논쟁 침묵으로 대처 하는 법천 스님은 부처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제 찰정도를 가르치신 후 부처님은 계속해서'무아(無我.anatman)'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번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그런 자아(自我)는 없다고 공언한 셈이다. 그 당시 흰두교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로서의 '나(我.Brahman)과 결국 궁극 실재인 브라흐만(梵.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 일여(梵我一如)`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부처님은 이처럼 오해되기 쉬운 흰두교 이론에 반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나` 란 결국 실체가 없다는 `무아.` 혹은 그런 것은 진정한 나일수 없다는 `비아(非我)` 를 가르친 것이다. 부처님은 왜 `무아`의 가르침을 설파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윤리적 요청으로서, 둘째는 이론적 귀결로서 `무아`일 수 밖에 없다고 본 것이 아닐까 한다.

첫째. 윤리적 요청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은 일상적인 이`나`를 영구불변하는 실체로 보고 떠받드는 것이 집착이나 증오나 교만이나 이기주의 등 모든 윤리적 문제꺼리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나`라고 하는 생각. 그리하여 나를 떠받들려는 애씀이 결국 `괴로움`으로 이끄는 근본 원인이 되는 셈이다. 다섯 수소승들에게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누구나 있는 그대로, 올바른 통찰을 가지고 보고 알아야 한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나' 가 아니다' 는 것을. 그리하여 (이 나에 대해) 염증을 느껴야 거기서 물러설 수 있고. 물러서야 참으로 자유스러울 수 있느니라" 고 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실 무아는 윤리적 출발점일 뿐 아니라 그 귀결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이기적인 나로부터 해방된 상태가 결국 윤리적 여정에서 이를 수 있는 장점이라 여기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자기를 부인하고,제 십자가를 지고,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지금의 나, 지금의 자기 목숨에 대한 집착에서 멋어나야 참 나를 찾고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자기 없앰, 혹은 자기 비움은 불교나 그리스도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교에서도 '사(私)' 를 잊어야 한다고 하고, 도가(道家)의 장자도 '오상아(吾喪我.나를 여윔)'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논리적 귀결로서의 '무아'이다. 영원불변의 실체로서의 '나' 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두 가지 기본 원리로 보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오온(五蘊.skandhas)'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자아라는 것은 이른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라는 다섯 가지 존재 요서들의 일시적 가합(假合)일 뿐 그 자체로는 독립적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란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色.rupa),느낌을 가능하게 하는 감수작용(受.vedana), 물리적이거나 지적 대상을 알아보는 인지작용(想.samjna), 정신적 상태나 성향을 꼴 지우는 정신작용(行.samskara), 사물을 판단하는 식별작용(識.vijnana)을 말한다. 마치 마차라는 것이 실제로는 판자, 바퀴살, 심보, 밧줄 등으로 이루어 진 것이고. '마차'라는 것은 그저 이런 것들이 합해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이름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자아란 잠정적으로 결합된 다섯 가지 요소에 붙여진 이름이나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이론으로 보면 살밍란 이처럼 다섯 가지 요소들이 순간적으로 합해졌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합해졌다가 흩어졌다가 또다시 합해지는 과정 사이의 시간이 너무나도 짧아 마치 연속적인 것 같이 느껴지지만 이것은 마치 영화 필름이 실제적으로는 한 조각 한 조각으로 끊어져 있어도 이것을 상영하면 연속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한편,죽음이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합해지는 것 사이의 틈이 보통 이상이고, 또 다시 합해질 때 전과같지 않은 배율과 조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의 자아가 독립적 실체를 가진 무엇일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는 연기(緣起.pratitya-samutpada, dependent co-arising) 사상 때문이기도 하다.


연기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기본 적인 원칙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예외 없이 다른 무엇에 의해 생겨난다는 가르침이다. 모두가 상호의존, 상호연관의 관계에서 새역나도 존재할 뿐 독자적인 실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있는 한, 독립적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따로 성립할 여지가 없게 되고 만다. 아무튼 우리의 일상적 자아란 이처럼 실체가 없기에 우리가 거기에 집착할 가치가 없는 것,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아중심주의가 모든 말썽과 사고의 근원임을 자각한 윤리적 판단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해 준 셈이다.


우리의 자아가 이처럼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자유스러워지는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나아가 개인의 자아 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본다. '무아'를 영어로 'no-self'라고만 하지 않고 'no-substance'라고도 번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이 무아의 가르침이 '논리적 귀결' 이라 했지만 그것은 불교 논리로 보았을때 하는 이야기이고, 더 큰 철학적 틀에서 볼 때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내포되어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카르마의 원리에 의하면 지금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나중 내가 그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인데 무아의 가르침처럼 '나'라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누구인가? '나'라는 것이 없다면 내가 행동한 과거를 기억하는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등등이다. 사실 '무아'와 같은 가르침이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화급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했다는 비유에 그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날 한 젊으이가 독화살에 맞았다. 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곧 의사를 불러 그 독화살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젋은이는 이를 거절하고, 이들이 이 독화살을 자기 몸에서 뽑아내기 전에 이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활이나 화살이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등을 미리 알아야겠다고 했다. 이 젊은이의 태도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논리적 적합성을 따지기 전에 우선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우선으로 다루는 실용적 태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부처님이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을 기피한 사실은 이른바 '부처님의 침묵(the Silence of Buddha)'이라는 것에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부처님은 △세상은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영원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원하지 않은 것이기도 한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아니한 것도 아닌가. △세상은 공간적으로 무한한 것인가,유한한 것인가, 무한한 것이기도 하고 유한한 것이기도 한가, 무한한 것도 아니고 유한한 것도 아닌 것인가? △여래는 죽음 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자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가? △영혼은 육체와 동일한가 다른가, 하는 14가지 질문을 '대답 할수 없는 질문(avyakrta)이라 여기고 외면했다. '부처가 외면한 그 열네 가지 질문'인 셈이다.


왜 이런 질문을 외면했을까? 부처님이 무지했기 때문일까?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였기 때문일까? 학자들 중에는 부처님이 궁극 실재에 대한 이론적이나 사변적인 명제 속에는 어쩔 수 없이 내재할 수 밖에 없는 모순율을 간파하고 대답을 기피한 것이라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하면 벌써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제한성 때문에 그 말은 이미 그 궁극적인 것에 대한 올바른 표현일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우리가 자유를 얻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이론이나 가르침이 있다. 이런 것들이라 하드라도 불교에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유를 얻는데 도움을 주는 '수단' 혹은 불교 용어로 '방편(方便)'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이런 가르침도, 부처님 스스로 말씀한 것과 같이, 결국 강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뗏목'이라는 것이다. 일단 강을 건넜으면 그 뗏목은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거기다 두고 우리의 갈 길을 계속해야 된다. 강을 건너게 해준 그 뗏목이 고마워 그것을 계속 지고 다니겠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했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은 가르칠 때 환자의 증상에 따라 다른 약을 처방하는 의사처럼 각자의 지적 영적 능력이나 필요에 부응해서 거기에 알맞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런 방법을 '응병여약(應病與藥)'.'대기설법(對機設法)'이라 한다. 중국 도가 사상에서 장자(壯子)도 이런 경우를 두고 "물고기를 잡는 틀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고 했다. 이른바 '득어망전(得漁忘筌)'이라는 것이다.


법천(59) 스님은 방랑자였다. 국내외 발길이 닿는 대로 이리저리 다니며 수행했다. 틀에 박히고 속세에 목을 매는 사찰이 싫었다. "요즘 불교계는 석가모니 부처를 말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그는 어찌 보면 불교계의 이단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떳떳하게 불교를 설파한다. 부처를 제대로 알아야 불교의 진 모습을 깨닫는다는 생각에 인도,네팔 등 불교 성지를 10차례 정도 왔다 갔다 했다. 스님이 머물고 있는 법천선원(경기도 용인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294-9) 을 찾았다. 널찍한 방 내부는 의외로 단순했다. 단상에 불상과 커다란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


스님은. 기자에게 대뜸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어도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서는 잘 들어보지 못했죠?"라고 묻는다. 불교의 근본은 석가모니인데 이를 잊어버린 불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추구하지 않는 세태 때문이라고 했다. 경전을 이해하려면 수행밖에 없는데 불자들이 생계나 권위에 치우치다 보니 발생한 결과라고 했다.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요즘 많은 스님이 '죄'라는 표현을 쓰는데 사실 불교에서는 죄라는 개념이 없어요. 불교는 신이 없는 종교라 누군가에 의해 심판받지도 않고 단지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죠. 부처님은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결과를, 악한 행위를 하면 악한 결과가 올 뿐이라고 말씀하셨죠."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보살에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분위기를 만들지만 실제로 이는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산사 음악회도 그의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춤과 노래는 수행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데 몇몇 사찰이 주도해서 음악회를 열고 이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려는 것은 불교 교리를 펴는 데 오히려 장애가되죠."


스님은 먹을거리에 대한 주관도 남다르다. 흔히 불교에서 금하고 있는 고기를 서슴없이 입에 댄다. 이런 모습에 과거에는 '땡중'이라는 비아냥도 많이 들었고 논쟁도 많이 했다고 한다. "계율에 살생하지 말라는 내용은 있어도 죽은 것을 먹지 말라는 내용은 없어요. 수행 방법 중 신도들에게 밥을 빌어오는 탁발(托鉢)이 있는데요. 주는 것은 뭐든지 먹는 것이 도리죠. 스리랑카나 베트남 등 외국 스님들도 먹는 것은 안 가립니다. 고기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변질돼 넘어온 것이죠. 부처님의 가르침에 완벽하게 따를 수는 없죠. 부처님이 사는 시대와 지금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그분의 말씀에 가장 가깝게 살려고 항상 애쓰죠. 이렇듯 남다른 법천 스님은 심산유곡 지리산 토굴에서 하산하신 일간 언론사 출신으로 시인이며 수필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철학박사 이시다.


법천 스님은 산사 토굴에서 기도 정진하며 바람소리, 새소리,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법력이 큰스님으로 안거 참선중 비몽사몽간에 관세음 부처님께서 출연 중생고를 제도하라는 말씀을 듣고 하산하시어 질병과 고통, 인간과의 갈등, 사업으로 인한 인생사의 삶에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상담하며 그들의 새로운 운으로 이끌어 재수 운을 찾아 줌으로써 중생고를제도하고 있다.


고통과 어려움 갈등 속에 힘들어 하시는 중생들이여 여기 법천스님을 만나 답답함과 고뇌에 찬 심신을 밝고 환한 기쁨으로 희망찬 미래를 설계 하십시오. 언제나 중생들의 미래를 열어주고 기쁨을 주는 법천스님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죽능리 294-9)에 머물고 계시며 전화연락은 010-2365-9955번으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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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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