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慧勤, 1320∼1376)

고려 말의 고승으로, 이름은 元慧, 법명은 慧勤, 법호는 懶翁,

속성은 牙씨, 주석한 堂은 江月軒이다.

21세 때 벗의 죽음을 보고 無常을 느끼어 출가를 결심하고,

문경 공덕산 妙寂庵에 있는 了然禪師를 찾아갔다.

그 후 전국의 사찰을 편력하다가

1343년(충혜왕 4) 양주 천보산 檜巖寺에 4년간 머물렀다.

이 절에 있던 石翁和尙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選佛場中坐 惺惺着眼看

見聞非他物 元是舊主人

선불장에 앉아서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라 보고 듣는 것 다른 물건 아니요 원래 그것은 옛 주인이다

27세 때인 1347년(충목왕 3) 元나라 燕都에 들어가 法源寺에 주석하고 있는 천축국 승려 指空禪師를 찾았다.

그곳에서 지공선사의 지도를 받으며 禪問答을 주고받았다.

이 때 지공선사에게 지어올린 오도송이다.

迷則山河爲所境

悟來塵塵是全身

迷悟兩頭俱打了

朝朝鷄向五更啼

미혹하면 산이나 강이 경계가 되고

깨치면 티끌마다 그대로가 온몸이네

미혹과 깨침을 모두 다 쳐부수었나니

닭은 아침마다 오경에 홰 치네

淨滋禪寺에서 임제종의 平山處林스님을 만나는데,

“指空의 千劍은 그만두고 그대의 一劍을 가져 오너라."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한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그는 指空의 법을 이어받고 平山處林의 법도 물려받았다.

그 후 중국 산천을 두루 유람하며 구도에 전념하다가, 원나라 順帝의 명으로 연경 廣濟禪寺에 머물게 된다.

유람 생활을 하던 그는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象頭庵에 머물렀다.

공민왕은 그를 王師로 봉하였다.

몇 년간 神光寺에 머물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산을 유람하던 그는 1366년 금강산에 正陽艤에 있었다.

1367년 가을에 공민왕은 청평사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그 해 지공선사가 입적하면서 맡긴 가사와 서신 한 통을 받았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法服, 바리를 하사받고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우왕 3년(1377) 세수 57세, 법랍 37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禪覺.

그는 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다.

종래의 九山禪門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臨濟의 禪風을 도입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念佛을 중요시하여, 담연적 청정심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三惡道를 벗어나는 正覺의 지름길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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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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