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선사/ 수덕사 조실>

거문고법문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

이것은 체(體) 가운데 현현(玄玄)한 곡조이로다.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

이것은 일구(一句)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

이것은 현현한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

이것은 돌장승 마음 가운데 겁(劫) 밖의 노래로다.

아차!

-만공선사(1871~1946)-

<만공선사의 오도송>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磨越西天

鶴鳴丑時寅日出

빈 산의 이치와 기운은 옛과 지금의 밖에 있는데

흰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왔는가?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 뜨네.

경허선사의 전법게(傳法偈)

雲月溪山處處同

叟山禪子大家風

慇懃分付無文印

一段機權活眼中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의 대가풍이여

은근히 무문인을 분부하노니

한조각 권세기를 안중에 살았구나.

내 수산월면(叟山月面)에게 글자 없는 도장을 주고

만공(滿空)이라는 법호(法號)를 내리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가도록 부촉(咐囑) 하노니 부디 잊지 않도록 하라.

만공선사는 경허선사에게 법을 이은 분으로 북쪽에 한암, 남쪽에 만공이라 할 만큼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한국불교의 수 많은 동량을 길러 내었다. 1905년 덕숭산에 인연을 맺은 뒤 열반에 들기까지 40여 년을 덕숭산에 머무르며 수 많은 동량들을 길러 내었다. 대표적으로는 춘성, 효봉, 전강 등이 있다.

그의 직계 제자로는 상수제자 보월을 비롯하여 벽초, 원담, 고봉, 혜암, 일엽, 금오, 월산 등 기라성 같은 법제자들을 길러 내었다.

많은 일화가 있으나 생략한다.

-마음달-

만공선사 (滿空禪師) (1871~1946)

근대의 고승. 여산송씨.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월면은 법명.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가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깨달았다. 그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을 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다. 1901년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하소서(願此鐘聲遍法界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면서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05년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대(金仙臺)을 짓고, 보임(保任)을 하는 동안 참선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었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하였고,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당시의 조선총독 데라 邇× 각도 지사가 동석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의 31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 반대의 요지는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불교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의하여 일본불교로 변질되어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는 한국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이 미나미총독을 우리가 지옥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941년, 서울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 초대되어 설법하고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였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도록 가르쳤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을 하다가 1946년 10월 20일에 입적하였다.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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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김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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