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

"마침내 열달이 차서 4월8일이 되었는데 부인이 나가서 유림하여 無廈樹 아래로 지나다가 문득 오른쪽 겨드랑이로 태자를 낳으셨다. 갓태어난 태자는 일곱걸음을 걸으며 한 손으로 하늘을,또 한 손으로 땅을 가르키며 말하기를,'하늘 위와 하늘 아래서 오직 나만이 높도다. 세계가 모두 괴로움이므로 내가 장차 편안케 하리라.'고 하였다. (수행본기경 보살강신품)

이 귀절은 우리들이 모두 잘알고 있는 탄생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시자 마자 사방을 향하여 일곱걸음을 걸으시면서 소리 높여 선언하셨기 때문에 즉행칠보(卽行七步)라고도 합니다. 매년 부처님 오신날이 되면 한번쯤은 되새겨 보는 귀절이라 너무나도 익숙한 문장일 것입니다. 익숙해진 문장일수록 이해의 정도가 깊어야 하는데 사실 그렇지 못하고 무관심속에서 의미없이 보내다가 부처님 오신날만 되면 요란스럽게 부각시키는 경구(經句)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탄생게에 담겨있는 참다운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음력 4월8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매년 돌아오는 기념일이지만 왠지 올해는 기쁜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아쉬운 감정이 드는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단순히 흘러간 세월의 깊이가 우리의 감정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해마다 돌아오는 의미의 깊이에 자신의 행동이 쫓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일 것입니다.

자신이 믿어온 신앙의 세월이 그지 짧지는 않은데 가슴속에 다가서는 신앙의 만족이 크지않고,자신의 신앙적 생활이 추구하는 목적이 올바른 것인지 확신이 없는 불안한 생활속에서는 종교의 궁극적 목표를 갖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리들이 법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불교의 이상적 목표인 성불(成佛)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있다보면 목표는 좋은데 자신들이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때문에 때때로 가고자하는 발심(發心)마저도 저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성불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지 못하고,또한 어떻게 그 길을 가야될지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역사속의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성불하셨으며 우리들은 어떻게 성불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경전 가운데 <자타카>라고 불려지는 경전이 있습니다. 이 '자타카'라는 말은 '태어나 있었을 때의 사건'을 의미하는 말로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한역(漢譯)해서는 <본생경(本生經)>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타카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성도하여 위대한 각자(覺者:깨달은 사람)가 되었던것은 현세의 수행만이 아니고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한없이 반복되어 온 생애 사이에 수행을 쌓아온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경전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 그 결과가 생기기 전의 노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결과의 화려함만을 좋아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루신 성불의 결과도 우리 중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좋은 결과이며 가져보고 싶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노력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자타카>는 말하고 있으며,또 성불이라는 종교적 목표에 대해 미리 겁을 먹고'그 어려운 길을 나는 갈 수 없어'라고 체념하는 중생들에게는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오랫동안 노력하면 뒤에는 성불이라는 거대한 결과도 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타카>에 보면 부처님께서 전생에 깨달음을 이루기위한 준비로써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의 덕행을 실행했고,우리들도 또한 영겁에 걸쳐 끝없는 수행을 계속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말로만 하게되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전생에 부처님께서 어떻게 수행하셨는지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사실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는 방대한 부분입니다. 부처님의 전생이야기가 방대한것은 부처님을 강조하기 위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그만큼 수행을 하여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과정의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에 그 많은 내용을 모두 샇펴볼수는 없고 부처님께서 전생에서 육바라밀을 실천하신 내용을 설하고 있는 경전인 <육도집경(六道集經)>안에 전해지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육도집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여러 모습을 지니시고 각각의 위치에서 육바라밀을 실천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대부분 장문의 이야기지만 지루함을 피하기 위하여 다소 내용이 짧은 이야기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 한 원숭이가 있었는데 힘이 원숭이 무리에서 뛰어나고 지혜가 사람보다 나았으며,항상 넓은 자비를 품고 중생을 건지기에 힘썼습니다. 하루는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가 과실을 따다가 산골짝 깊은 구렁에 사냥을 하던 사람이 빠져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원숭이는,

"내가 부처되기를 서원한 것은 오직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이제 이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니 내가 마땅히 언덕을 내려가서 업고 나오리라." 하고 드디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사람을 업고 산으로 올라와 길을 가르키면서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다시는 헤어진 뒤로 삼가 나쁜 짓을 하지 마시오."

원숭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은 오랫동안 굶은 탓에 갑자기 원숭이를 잡아먹고 싶은 사악한 생각을 일으켰습니다.


리고는 자신을 구해준 사실을 잊어버린 채 돌로 원숭이 머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원숭이는 사랑하고 가엾어하는 마음으로 그가 악한 생각을 품은 것을 슬퍼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금 내힘으로 능히 건지지 못할 자는 내세에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고 제도하여서 언제든지 이와같이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도록 하리라.'하고 죽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의 원숭이는 나였고 골짜기에 빠진 사람은 데다닷다이었으니라.보살이 인욕바라밀의 행함이 이러하니라."

<육도집경>에는 이 이야기 이외에도 보시에서 지혜에 이르는 많은 이야기들이 설해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위에서 보신바와 같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중생의 이익을 위해 보살도(菩薩道)을 실천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말들은 많이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애정이 남들에 대한 애정보다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서 느낄수 있는 사실은 두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실 수 있었던것은 현세에서 보여 주었던 6년간의 수행에 의해서 깨달을 수 있었던것이 아니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육바라밀을 실천하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우리 중생들도 육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다면 현재가 아니더라도 미래세 어느때에는 성불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불하려면 육바라밀의 실천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속에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이것을 우리는 불성(佛性)이라고도 합니다.이 불성은 하나의 신비한 씨앗과도 같습니다. 씨앗을 키워서 푸르른 거목을 만들듯 우리는 이 '부처의 씨앗'을 키워서 부처님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성에 대해서 <대방등여래장경>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계십니다. "선남자야,부처는 중생의 불성을 보시고 그것을 피게 하고자 하사 정법을 설하여 번뇌를 없애고 불성을 나타내시느니라."

그럼 지금부터는 불성을 찾으러 가볼까요?

우리는 불성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탄생게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 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것은 탄생게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불교가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한 신앙적 목표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면서 중생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불교적 사상은 모두가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유아독존(唯我獨尊)'입니다.여기서 말하는 '我'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중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육바라밀을 실천한다면 모두 성불할 수 있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그래서 다른 표현으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그러한 불성블 찾기 보다는 무명(無明)에 가리어 불성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생사윤회의 고통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보다는 자신과 물질만을 소중히 하는 애욕(愛慾)의 마음이 가세하여 올바른 자신의 불성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찾지 못하는 중생들에 대해 부처님께서 어떠한 것보다도 자신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불전(佛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바라시니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하시고 우루벨라로 가시는 도중 한 숲으로 들어가 나무 밑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서른명의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무엇인가를 찾으며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 앞에 이르러 물었습니다.

"존자님, 한 여인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젊은이들이여,어떤 여인인가?" "존자님,저희들은 이 근처 양가의 청년들인데 각기 아내를 데리고 놀이를 나왔습니다.그 런데 한 친구가 독신이라 기생을 불러왔더니 그 기생이 저희들의 귀중품을 훔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그 기생을 쫓아서 달려왔습니다."

"젊은이들이여,그대들은 그 여인을 찾는 것과 그대 자신을 찾는 것 가운데 어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가?" 놀이에만 정신팔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존자님,물론 저희 자신을 찾는 것이 더 급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좋다 젊은이들이여,그러면 여기 와 앉으라.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리라."

여러분들은 무엇을 먼저 찾으시겠습니까? 일체가 무상한 현세에서 없어지고 마는 물질에 애착과 욕심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을 잃어버리며,지혜를 잃어버렸기 대문에 자신안에 있는 불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는 더 문제인 것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도 모르는 중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물질보다는 자신을 찾는일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바로 그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안에 그러한 불성이 있는지,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모르는 중생은 참으로 난감합니다. 설명을 해줘도 이해가 되지 않고,강압적으로 주입시키면 도망을 가니 성질 급한 사람은 쉽게 포기해서 그 사람이 불교의 길에 들어서기가 어렵지만 사실 이런 사람일수록 좀더 시간을 갖고 자세히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45년 동안 중생을 교화하실때 모든 중생들이 바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정말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도 모르는 중생이지만 부처님은 시간을 갖고 중생이 자신속에 불성이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법화경 신해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우연히 사고로 아버지와 헤어져 고아가 되어 오랜 세월을 유랑하면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몸은 피로하고 마음은 미천해진 나그네는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마침 옛고향 마을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고 마을에서 걸식할 집을 찾기 위해 가장 부자인 장자(長者)의 집 밖에서 기웃거렸습니다.

이 집의 주인인 장자는 다름아닌 그 나그네의 아버지였습니다. 장자는 잃어버린 아들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아들을 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장자인 아버지는 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걸인이 곧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장자는 크게 기뻐하며 생각했습니다.

"이제 내 아들이 돌아왔구나.창고에 가득한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 돌아왔으니 내 이제 무엇을 다시 근심하랴."

장자는 곧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갔습니다. 하인들을 불러서 나그네를 맞아 들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는 자기를 잡으로 오는줄 알고 놀라 뿌리치며 동리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아버지는 깊이 생각하다가 행색이 초라한 하인을 불러 당부하였습니다.

"너희들은 그 걸인에게 가서 장자의 집에 좋은 일거리가 생겨 삯을 곱절로 준다니 함께 일하지 않겠는가?이렇게 권해 보아라."

마침내 그 아들은 머슴으로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쓰레기 치는 일을 시키다가 아들의 마음이 차츰 편해지고 불안감이 사라져감에 따라 장자인 아버지는 더 중요한 일들을 맡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인 머슴은 이제 장자을 대신하여 집안의 전재산을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에 따라 그의 마음도 넓어지고 그의 기상도 늠름해졌습니다. 어느날 장자는 모든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를 옆자리에 앉게 하였습니다.
장자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그의 손을 잡으며 대중들에게 큰소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여러분,여기 이 사람은 본래 내 자식입니다.이제 잃었던 자식을 도로 찾았으니 나는아무 근심이 없습니다.내 창고에 가득찬 금은보화는 오늘부터 내 자식에게 넘겨줍니다.이제부터는 내 자식이 주인입니다."

우리는 불성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무한히 맑고,밝고 착하고,자비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실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저 장자의 아들처럼 자꾸 의심하고 도망치려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존귀한 존재임을 모르고 매일같이 남에게 의존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존적 생활이 되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보다 쉽고,보다 편하게 살아가고픈 욕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힌 중생이지만 장자인 아버지가 걸인 아들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부처님께서도 우리 중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아니 버릴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이 바로 부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방편으로 중생들을 일깨워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주시고 주인자리로 점차 가까이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때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옆자리에 앉히시고 만천하에 크게 선포하십니다.

"여러분,여기 이 사람은 본래 내 자식입니다.이제 잃었던 자식을 도로 찾았으니 나는아무 근심이 없습니다.내 창고에 가득찬 금은보화는 오늘부터 내 자식에게 넘겨줍니다. 이제부터는 내 자식이 주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자애로운 어버이십니다.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의 자식입니다. 그이유는 내 불성이 곧 부처님의 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생명은 곧 부처님의 진리광명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애를 쓰면서 진리의 바다에 이끌고자 하지만 중생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세존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부처님께서는 위에서 보셨던 것처럼 자신을 찾는 일을 도와주시기도 하고,또 찾을때까지 온갖 방편을 쓰면서 기다려 주시지만 바른 법으로도 길들여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명되면 부처님께서도 그냥 내버려두고 너무 마음 쓰지말라고 하십니다.


조금 서운한 내용이지만 중생들에게 불법을 만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는것이며,불법을 만난 중생들은 더욱더 노력해야 함을 주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어느정도 단호한 것인지 경전을 통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중아함경 제25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죽림정사에 계셨습니다. 그때 사미 아니나화제 또한 죽림정사에 선실에 있었습니다. 이때 왕동자 기파세나는 오후에 천천히거닐며 아이나화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 서로 인사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진 사람 아이나화제여,진실로 비구는 이 불법 안에서 수행하여 일념을 이룰수 있습니까?"

이에 아이나화제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자기가 들어 알고 있는 바대로 설명하여 왕동자를 설득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다 듣고 난 왕동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훌쩍 가버렸습니다.

"어진 사람이여,들어보니 이 법으로는 일념이 될 수 없겠습니다."

왕동자가 가 버린뒤 아이나화제는 부처님 계신곳으로 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뒤 한쪽에 물러나 앉아 조금전에 있었던 일을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나화제여,그만 두라.왕동자 기파세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그는 오욕락에 붙들려 있고 갖가지 욕심에 불타고 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그를 아무리 그 상태에서 벗아나게 하고자해도 그리되지 않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어 아이아화제를 위로하셨습니다.


"아이나화제여,사람과 짐승중에는 도저히 길들일 수 없는 무리와 길들일 수 있는 무리가 있듯이,이 법을 듣고 길들여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느니라. 또 어떤 마을과 아름다운 평원 사이에 큰 돌산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 중에는 돌산에 올라가 맞은 편 평원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과 돌산 아래 주저 앉아 그것을 보지못한체 저편에 아름다운 평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이 법을 듣고 길들여져 깨달음을 얻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도 있느니라. 아이나화제여,저 왕동자는 바로 길들일 수 없는 사람이요, 돌산 아래 주저 앉아 있는 사람이니라.그러니 마음쓰지 마라."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바라는 모습은 진리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인간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중아함경 제39경 바라바당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어떠한 인간이 가장 훌륭한 인간인지 묻는 질문에 삼독을 뿌리채 멸하고 생사유전계를 영원히 벗어나 열반을 얻은 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왜냐하면 삼독이 없으면 생사유전계를 초월하여 진리와 하나가 되어 열반을 얻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말씁대로라면 분명히 우리 중생은 불성이 있으므로 준귀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그 누구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또 욕락에 빠져 그것을 찾고자하는 노력이 없기 때문에 성불이라는 정상에 다다르지 못하고 윤회의 과정에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정상의 길은 험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험하다고 해서 눈앞에 보이는 인생의 환희를 포기할 어리석은 중생은 없겠지요? 그러므로 이번 부처님 오신 날은 화려한 행사를 계획하는 일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진리와 하나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동안 욕심에 빠져 불성을 잃어버리고 육바라밀을 실천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성불하십시요!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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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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