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논산 쌍계사 대웅전 내부와 꽃살문, 수로 교통의 중심지에 17세기 이후에 세운 절간들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상인들의 문화가 반영되고 있다. 화려한 꽃살문과 내부 장식이 대단하다.

논산의 쌍계사와 부안의 개암사는 17세기 중엽부터 시작한 아름다운 건물풍의 시작이었다. 대부분 화려한 다포식 공포에다 큰 지붕, 화려한 내부 장식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꼭 필요한 대웅전과 격이 좀 낮은 나한전 소박한 명부전도 갖추고 있다. 형식 완결에 필요한 일주문, 천왕문 등은 종종 생략하기 일쑤였다. 16세기 절간의 완벽구조와는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논산 쌍계사는 대웅전의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유명하다. 16세기 절집의 내부의 엄격성을 일부 살리는 가운데 엄청나게 화려해져 가고 있다. 내출목 공포의 끝을 촛불처럼 장식하였다. 우물천정도 짜 맞추었다. 천정에는 용과 학이 내려다보고 날아다니고 있다. 가히 진리의 빛이 만발한 극락을 모습을 구체화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부안 개암사는 시원한 외관으로 사람들의 맘을 잡아끈다. 멋있는 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친 처마 곡선은 마치 학이 날개를 접는 것 같다고 누군가 표현했다. 치장하고 싶은 맘은 문살을 그냥 두었을 리 없다. 갖가지 꽃이 문살을 대신하고 있다. 이때부터 꽃살문 사찰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은 불교를 억압한 나라라고 한다. 어떻게 이런 절간이 전국 곳곳에서 건축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조선의 종교는 불교이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유교는 제사를 중시하긴 했지만, 내세를 관리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내세는 불교가 담당했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이 살짝 몰래 지방에 사찰을 조금 세웠다. 규모가 클 수가 없었다. 16세기에 들어 양반지주들이 실질적인 지배세력으로 성장하고 경제력을 장악하자, 사찰 건축의 주체는 지주 양반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극락왕생 기원할 수 있고,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사찰들을 많이 지었다. 형식 완결을 추구하는 양반들의 문화가 반영되어 규모가 크고 형식을 대체로 갖춘 거대 사찰들이 16세기와 17세기 초에 많이 등장하였다.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과 대웅전이 이 시기에 지은 대표적인 절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시점부터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반지주 못지않게 상공인들이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는 중인과 상인들이 신분은 낮았지만 경제력은 만만치 않았다. 이들이 차츰 차츰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의 기본 중에 기본은 신용과 의리다. 자신의 집을 크게 짓고 싶었으나 지체 높은 양반들이 그냥 두지 않았다. 그래서 상인들은 건물에 대한 규제가 없는 사찰을 크게 짓기 시작했다. 아울러 사찰로 대중에게 내세 소원의 장소를 마련해 줌으로써 믿음과 신용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찰은 위험한 물길에 희생당한 동료 상인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수도 있었다. 실질적인 계층상승의 지위를 확보할 수도 있었다. ‘돌멩이 하나에 새 여러 마리’였던 것이다. 17세기부터 상인들이 주체가 된 아름다운 사찰들은 대부분 상업 활동 지역 부근, 교통의 요지와 수로 중심지였다. 서해안 지역과 전라도 쪽 남해안이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다. 논산의 강경장은 당시 전국적인 물산이 교류되었던 곳이다. 논산 쌍계사와 부안 개암사의 뒤를 이어 변산 내소사, 강화 전등사와 정수사 그리고 해남의 미황사가 줄줄이 상인들의 필요에 따라 세워졌다. 아름다운 절은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전수진 기자
저작권자 © SBC 서울불교방송 불교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