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 결제법어

一缽千家飯 孤身萬里遊  일발천가반 고신만리유
淸眼都人小 問路白雲頭  청안도인소 문로백운두
 
바릿대 하나로 천촌만가에 밥을 빌어가며
외로운 몸 만리 밖 너머까지 쉼 없는 수행길이여
세상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보아주지 않지만
화두를 이끌고 백운이 가던 길을 넘는다.

옛 선사의 만행 시 한편을 의역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의 결제대중은 산철(해제)동안 본분사에서 벗어남 없이 청안정진 하셨습니까?
산승은 잠시 동해안 쪽과 남쪽 동네를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우리승가와 산승을 보는 눈이 맑지 않더란 말은 그분들이 나를 오히려 안타깝고 불쌍하게 본다는, 그 분들은 비록 절집에서 도를 닦지 않았어도 고생스런 삶속에 인생의 깨우침이 있어서 모든 집착에서 덜 떨어진 나를 금방 알아봅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수행계차는 그만두고 소인의 경계만 높아 금생의 현실고를 넘어서는 것도 모르니 이 어찌하리오.
당나귀 앞과 말뒤(驢前馬後)만 쫓는 자가 언제 쯤 수처작주(隨處作主)가 됩니까?

다른 예는 필요 없이 지금의 고통 중에 세월호의 비극과 네팔국민들의 참상 앞에 속수무책으로 좌절감만 깊어가고, 이 땅의 젊은이들과 희망과 의욕도 없이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병들어가는 이 땅의 각계각층 제반고통의 현실 앞에 같은 동업죄인으로 한줄기 맑은 바람이라도 되지 못함이 안타까웠습니다.
현실을 묵인하고 무욕적인 삶만 영위해 간다면 우리를 살리는 단월과 사회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써먹지도 못하는 나의 깨달음을 왜 추구하며 그것 또한 무엇인가 반문해 보았습니다.

세상과 모든 경계에 흔들리면서 입과 생각으로만 깨달아 안일하게도 과거 다른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내 살림 삼아 교묘하게 큰소리치며 살아온 결과 당송(唐宋)시대를 벗어나지 못함은 아닐까요?

부처님과 선지식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본질적인 이상으로만 실현시키는 면에 집착하여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회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에 허약함이 한국불교의 단점인 것 같습니다. 삶의 현실 속에서 나온 불교진리를 현장의 삶과 유리시켜 본말이 전도된 입장만 됐으니 그 결과는 나와 더불어 목하 우리의 삶터의 모든 문제(모순)들이 광화문 앞까지 철벽으로 쌓여 공생공업의 죄업만 깊어 갑니다.
더 쌓이면 갑도 을도 공멸할 것이요. 사람의 가슴으로 해원상생의 길을 택한다면 다함께 사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철에 각자의 은산철벽을 타파한다면 악각악습까지 녹아(頓悟)서 조국통일까지 성취하여 세계인류 평화를 이루는데 큰 빛이 될 것입니다.

아.. 중생과 역사 앞에만 서면 언제나 미숙한 존재가 되는 병이여..
십팔금(十八金)도 못되는 내가 진금덩이 행세하려니 그러나 봅니다.
이 자리에서 나와 전체를 해방(탈)시킵시다.
모든 수행자들이여. 세상과 일고지는 매사에 일희일비 말고 죽기 살기로 정진합시다.

득도달관의 경지가 이미 초발심에 다 들어있지 않습니까?
철벽이여! 은산철벽이여!
하나 뚫리면 다 뚫리고 아니면 계속해야 하니
그러다가 결국 내가 지쳐 죽을 일이로다.
그런데 은산철벽은 누가 쳐대는가? 할

불기2559년 하안거 결제일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

SNS 기사보내기
곽선영기자
저작권자 © SBC 서울불교방송 불교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