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불교조계종 종정

 *불광사 주지(경남 양산시 소재)

 *SBC서울불교방송 불교일보 사장

 *세계불교승왕 청봉 석정산 예하

 *전 사단법인 대한불교종단총연합회 회장

 

 

인생의 가을을 풍요롭게

 

내가 뿌리는 씨앗이고

지혜는 내가 밭가는 가레이며

신.구.의.악업을 없애는 것이

내 밭의 김매기다.

-잡아함경-

 

봄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계절이고 가을은 노인들의 마음을 심난하게 하는 계절이라고들 말합니다.시집 못 간 노처녀의 히스테리가 심해지는 계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을이 비록 우수수지는 낙엽이나 온 산에 가득찬 단풍으로 인해 인생의 무상함을 실감하게 하는 계절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농사를 지어도 별로 소득이 없어서 추수를 끝낸 농가라도 오히려 수심이 가득하다고 하니 가을이라고 누구에게나 풍성한 계절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습니다만,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피땀 흘려서 가꾼 노력의 댓가를 가을에 거둬들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네가 되풀이하여 살아온 생활양태인 것만은 변함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이 가을과 연관해서 우리 인생의 가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생일대사로 생사문제,곧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꼽으셨습니다.불교만이 아니고 어느 종교건간에 삶과 죽음의 문제를 떠나서는 존재의의를 찾을 수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불교처럼 생사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진 종교도 없다고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셨고,출가하셨고,성도하셨고,45년간 고구정녕하게 이 생사대사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는데만 정신을 빼앗기고 죽음이라는 다른한면에서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죽음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병이 들어서 병원에 입원하고서야 비로소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평상시에는 천년 만년이나 살것처럼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힘이 있을 때 인생의 가을인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오늘을 뜻 있게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은 불교를 믿는 목적이 당장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느냐 어떤 기도를 하면 사업이 잘 되고,어떤 기도를 하면 자식이 시험에 붙느냐 하는데 쏠려 본래의 목적과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물론 그런일도 중요합니다.그러나 부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출가.성도하시어 45년간 중생들을 위하여 설하신 가르침들은 그와 같은 지엽적인 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사고해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소원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 동안의 만족에 그치는 것들입니다.자식이 대학에 합격했다고 해서 희희낙락하고,부처님이시여 감사합니다-해보아야 그것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해마다 가을이 되면 온 산에 빨간 단풍이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단풍놀이는 잠시잠깐이고 온 산은 다시 적막강산의 겨울로 변하듯이 사람들이 바라는 물질적인 욕구나 사회적인 욕망들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생사해탈을 그토록 강조하셨고 생사해탈을 위해서는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영원한 생명인 불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현실적인 욕구에 의해서 여러 가지의 소원들을 가지고 절에 다니지만 이제는 유치원생으로 만족하지만 말고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서 좀 더 높은 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인생대사 즉 생사대사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일에 대해 비유룰 들어 말한다면 처음으로 농사를 짓게 된 농부가 첫 봄에는 단지 희망만을 안고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싹을 가꾸느라고 정신없이 지내고,가을이 되어서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나서야 명년 농사는 어떻게 지어야 가을에 가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단지 금생만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한없는 세월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왔고 이대로 살다가는 똑같은 생활을 영원히 반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옛 스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생사대사를 해결하고 성불에 이르는 데에도 몇가지의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이를 세단계로 나누는데,첫째는 지무생사(知無生死)요,다음은 계무생가(契無生死),마지막으로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단계에 이르게 됨으로써 생사해탈의 불보살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 단계인 지무생사(知無生死)란 <생사가 본래 없다>고 하는 생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우리의 육신은 지.수.화.풍 4대 원소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정신작용이 인연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일 뿐 본래 내가 어디에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죽음오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국에 장자라는 유명한 사상가가 있었습니다.공자.맹자는 유교에서 첫째.둘째가는 사람이므로 유교를 “공맹지도(孔孟之道)”라고 하는데 이와 쌍벽을 이룬 노자.장자의 사상을 “노장철학(老莊哲學)”이라고 합니다.노자와 장자의 철학사상이란 뜻입니다.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친구인 혜자가 문상을 갔습니다.그런데 초상집에서 장구소리가 들려 왔습니다.장자가 두다리를 뻗고 앉아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혜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서 장자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그대는 부인과 함께 살면서 자식을 길렀고 이미 몸이 늙었네.마누라가 죽어서 울지 않는 것은 혹 모르지마는 장구를 치면서 노래까지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에 장자가 답하기를,

“그렇지 않네 그가 처음 죽었을 때에야,낸들 어찌 슬퍼하고 놀라워하지 않았겠나.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 나기 이전의 일을 곰곰 생각해보니 원래 생이 없었던 것이요,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 형상이 없었던 것이며,형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 기운이 없었던 것일세

 

어떤 무엇이 흐릿하고 황홀한 가운데 섞이어 있다가 그것이 변해서 기운이 되고,기운이 변해서 형상이 생겼고 형상이 변해 생이 생겼고,그 생이 이제 또 변해서 죽음으로 간 것이네.이는 저 춘하추동 네 철이 되풀이해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네.아내는 지금 (하늘과 땅 사이의) 큰 방안에 편안히 누워있는데 내가 시끄러이 소리내어 운다면,내 스스로 천명(天命)을 모르는 것처럼 생각되므로 나는 울기를 그만 둔 것이네.“

 

이 대화는 장자의 지락편(至樂篇)에 나오는 것인데 장자란 분의 투철한 생사관을 엿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내용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누구나 생사란 둘이 아니라는 말들을 곧 잘 합니다.그러나 직접 자기의 부모나 남편.처.자식들으 죽음에 대해서 이토록 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장자는 비록 불자가 아니라고 해도 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이처럼 투철한 생사관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계무생사로 이는 “생사없음과 계합”하는 삶의 단계입니다.계합이란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생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삶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생사가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사람이라도 막상 자기자신이 죽음을 당하는 경우는 이론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명한 선지식인 가운데 경허스님이란 분이 계십니다.경허스님은 일찍 출가하여 모든 경전을 통달하시고 이미 스물세살때에 동학사의 강사스님으로 학인들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습니다.

 

하루는 속가(俗家)를 한번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대중에게 사유를 말하고 속가를 찾아 가던 중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므로 어느집의 처마밑에 들어섰는데 “빨리 가라”고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몇 집을 더 찾아갔지만 역시 똑같이 받아주지 않고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그 중 한집에서는 큰 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전염병이 크게 번져 걸렸다 하면 바로 죽는 판국인데,그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죽을 곳을 찾아 왔는가?”

 

경허스님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치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마치 죽음이 목전에 다달은 것처럼 느껴지자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가 모두 꿈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일류강사스님인데 본래 생사가 없다는 것쯤 모를리 없지만 막상 죽음이 자기자신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사무쳤던 것입니다.그 마을에는 콜레라라고 하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그 마을을 빠져 나온 즉시 동학사로 되돌아 가서 대중들을 해산한 후 이때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참선을 시작해서 마침내 생사가 본래없는 자신의 진면목을 직접 깨닫고 결국 유명한 도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생사가 없다고 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직접 죽음이 목전에 당도했을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국 스님 가운데 승조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그마라습 삼장법사의 제자로 겨우 31세에 폭군을 만나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사대원무주 오온본래공 장두임백인 유사참춘풍(四大元無主 五蘊本來空 狀頭臨白刃 猶似斬春風)이라는 유명한 임종게를 남기셨습니다.

 

“지수화풍으로 된 이 사대육신은 본래 주인이 없고 색수상행식으로 된 이 몸도 본래 공한 것이라.머리위에 흰 칼날이 번쩍인다해도 오히려 봄바람을 베이는 것과 같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단계가 되어야 계무생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단계는 “생사없음을 활용”하는 이상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의 삶이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중생제도를 위하여 태어나고 중생제도를 위하여 일부러 열반하시는 것입니다.

 

<묘법연화경>(여래수량품)에는 “훌륭한 의원이 아들을 치료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의사인 아버지가 볼 일이 있어서 외국에 간 사이에 아들들이 독약을 잘못 마시고 독이 온 몸에 퍼져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아버지는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고 급히 해독제를 지어 아들들에게 마시게 하여 치료했습니다.그러나 아들들 중에는 독이 너무 심하게 퍼져서 본심을 잃어버려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고 약을 마시지 않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본심을 잃고 약을 복용하지 않자 이들을 구할 목적으로 다시 외국으로 나가면서,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내 이제 늙고 쇠약하여 죽게 되었는데 이제 여기에 좋은 약을 남겨두고 떠나니 두려워 하지 말고 이 약을 마셔라”

 

이런 말을 해놓고 외국으로 나간 후 사자를 보내서 거짓으로 아버지가 죽었다고 전하게 했습니다.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제서야 아들들은 본심을 회복하여 아버지가 남겨 놓은 약을 먹고 병이 낫게 되었다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부처님, 독약은 무명,해옥제는 부처님의 가르침,특히 이 비유에서는 법화경을 말합니다.그리고 아들들은 우리 중생들입니다.

 

중생들이 부처님의 말을 믿지 않고 무명이라는 독에 파묻혀 신음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런 우리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부처님은 일부러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진실로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방편으로 돌아가신 모습을 보였을 뿐입니다.

이처럼 생사를 자유자재로 하는 경지를 용무생사라고 하고 모든 불부살님들은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생사의 본질을 깨닫고 이를 초월하여 이상적인 삶을 사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단지 옛사람이나 불보살님들의 생사에 한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삶과 죽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이 믿음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믿음의 싹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김을 매고 가꾸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앗이고

지혜는 내가 밭가는 가레이며

신.구.의.악업을 없애는 것이

내 밭의 김매기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잠시 잠깐 살다가는 금생이지만 이 금생에 있어서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믿음과 지혜의 선업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생사고해를 무사히 건너서 삼계윤회를 단절하고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가장 훌륭한 처방전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란 씨앗은 다른 믿음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이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불성에 대한 확신입니다.우리 모두에게 부처님과 털끝도 다름없는 영원한 생명,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 불성이 있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는 마음이 바로 <믿음>이라는 씨앗입니다.

 

다른 종교읭 <믿음>은 신의 섭리나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마음을 말하지만 불교의 믿음은 자기자신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이 있다는 자기존재에 대한 확신입니다.또한 믿음은 누구든지 노력하면 반드시 생사를 초월한 이 불성을 회복하여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이런 믿음이라야 노력하는 목적의식이 확고하게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지혜라는 연장으로 무명의 단단한 흙을 부수지 않고는 싹이 돋지 않습니다.농부가 밭을 갈고 흙을 고른 후에 씨를 뿌리듯이 불성을 덮고 있는 두꺼운 흙을 지혜라는 가레로 갈아 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지혜입니다.이 사대육신은 인연따라 생명을 거듭하는 것이요 이 육신뿐만 아니라 온갖 것들이 무상하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슬기가 바로 지혜라고 하는 가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 밭을 갈아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도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무성한 잡초를 제거하는 일입니다.부처님께서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악업을 없애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을은 만물이 숙연해지는 계절입니다.온갖 곤충들도 땅속이나 나무껍질 속에 알을 낳은 후에 삶을 마감하는 계절입니다.다람쥐도 한해의 겨우살이를 위해서 알밤을 모아 차곡차곡 곳간에 저장해 놓는 계절입니다.

 

단풍놀이에 치마 벗겨진 줄 모른다는 말도 있습니다.“노세노세 젊어서 노세”해보아야 자기만 손해 봅니다.비록 남들은 단풍구경이다 관광이다 열을 내더라도 우리 불자들만은 마음을 가다듬고 숙연한 가을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지혜로 집착의 무명토(無明土)를 갈아 엎고,믿음의 씨앗을 뿌린 후 신구의 삼업을 잘 단속하여 자신의 불성을 회복합시다.그리하여 생사윤회를 단절하고 연원한 삶을 성취합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청봉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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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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