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허(淸虛)의 달마찬(達磨讚)

흰 구름 오려서 누더기 깁고 푸른 물 떠다가 눈동자 삼았네 뱃 속에 주옥이 가득 찼으니 온몸이 밤 하늘에 별처럼 빛나네

작자는 청허 선사(1520~1604) 이름은 휴정(休靜). 자는 현옹. 묘향산에 오래 있었으므로 서산대사(西山大師)라 한다. 저서 「선가귀감(禪家龜鑑)」「청허당집」8권 등, 역자는 석정 스님이다.

중국불교하면 곧 선불교를 떠올리게 된다. 선종말고도 많은 종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선종이 그 대표적 핵심의 위상을 누려왔기 때문이다. 달마는 그 선종의 시조이다. 달마의 범명은 보디달마(Bodhidharma)인 바, 달마는 그 약칭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불교학대사전」을 펼쳐보자. 「달마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성장하여 대승불교의 승려가 돼 선에 통달하여 반야다라 존자의 법통을 이은 뒤 벵골만에서 배로 떠나 오랜 항해 끝에 중국 광동에 이르렀다.」그리고 지금의 남경인 금릉에 가서 양무제를 만났다. 그때 달마 대사의 나이가 130세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남북으로 나뉜 채 북쪽 낙양에는 북위가 도읍을 정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양나라가 있었다. 양무제는 불심천자라 불리울 정도의 사람이어서 항상 가사를 걸치고 방광반야경을 강의했고 또 오경의주 2백여 권 및 그밖의 많은 저술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세적인 이익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달마 대사를 만나자 먼저 "짐은 절을 세우고 경을 간행하며 승려들을 권장하오. 그러니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하고 질문하자, 달마는 "무공덕이오."라고 잘라 말했다. 양무제는 달마 대사의 언행을 알아듣지 못했다.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가 양나라로 갔다. 그리고는 소림산에서 9년간 면벽의 침묵을 시작했다.(이하생략)」

인용이 길었지만, 양무제와의 일화 한토막은 능히 우리에게 달마의 심경과 기개의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즉 어떠한 경계에 처해서도 흔들릴 줄 몰랐던 그의 부동심, 금강의 마음, 언제 어디서나 쩡쩡 울리는 주체성으로 밀고 나갈밖엔 없었던 것이 그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청허의 달마찬은 불과 4행안에 달마의 그런 진면목을 형상화한 놀라운 시다. 명확하고도 적절한 심상에 의한 표현의 솜씨가 너무도 훌륭해서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인 것이다.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아니, 실은 그림이상의 것이어서, 내가 보아왔던 어떠한 달마도도 이에는 못미친다. 16세기 이 나라 선승에 의해 이런 걸작시편이 쓰여졌다는 사실은 더욱 놀라우며 이제 우리는 앞서간 선승처럼 마음의 눈을 뜨고 상상력을 펼쳐야겠다.

대한불교 조계종 약사사 주지 안월 스님

【안월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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