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스님(1864 ~ 1940)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개혁운동가이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도 참가했던 용성(龍城, 1864 ~ 1940)스님이 1940년 2월 24일, 76세로 입적했습니다.

1864년 5월 8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백상규(白相奎)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용성 스님은, 16세 때인 1880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진종 (辰鍾)이라는 법명을 얻었습니다.

1911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 1944)과 함께, 포교활동을 벌였는데, 이때, 왕실의 한 상궁이 내 준 집은, 평생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안식처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곳을 '대각사(大覺寺)'라고 이름지은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그가 대각사에 본격적으로 모물기 시작한 것은, 불교계의 대표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돌아온 1922년부터였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대각교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당시 친일적 색채가 점점 짙어가던 불교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일제가 불교계를 황폐화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주지의 자격에 비구계 조항을 삭제하려 하자, "3천년의 전통을 가진 불교에 '비구승(比丘僧:독자적으로 불도를 닦는 스님)'만이 법맥으로 면면할 따름이요, 대처-육식을 하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없노라" 1926년, <승려의 대처식육(帶妻食肉) 금지 견백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견백서가 받아들이지지 않자, 이듬해 '대각교'윤동을 공식 선언하고, 기존 불교 교단에 자신의 승적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용성 스님은 불교의 현대화 및 대중화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옥중이서 다은 종교의 신자들이 반입해서 읽고 있던 신앙서적들이 한글로 씌어진 것을 보고, 불경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한 뒤,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에 힘써, <조선글 화엄경>을 비롯, 30여종의 불경을 우리말로 옮겼고, 한문으로 된 불교 의식도 한글화했습니다.

또 불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찬불가'를 만들어 보급시켰으며, 일요 불교학교을 운영하면서, 직접 오르간을 치기도 했습니다.

"생산하지 못하는 종교는 흡혈적 종교요, 사기적 종교"라고 말하기도 했던 그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하며, 경남 함양과 만주 용정에,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수차례 독립운동을 위해 쓰라며, 많은 자금을 보내, 해방 후 귀국한 김구(金九,1876~1949) 등 임종 요인들이 대각사를 찾아가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또, 대각사는 용성 스님의 법맥을 잇는 이른바 <용성 문중>의 큰 집과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동산(東山,1888 ~ 1965) 동헌(東軒,1896 ~ 1983) 자운(慈雲,1911 ~1992) 고암(古庵,1899 ~ 1988) 스님 등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큰스님들이 대거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용성 스님의 <용성문중>은 만공(滿空,1871 ~ 1946)스님의 법맥을 잇는 <덕수 문중>과 함께, 한국 불교 조계종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용성 스님의 직제자들은 물론이고, 성철(性澈,1911~ 1993), 혜암(慧庵, 1879 ~ 1985) 광덕(廣德, 1927~ 1999) 스님등 유명한 스님들도 모두 한번씩은 대각사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전수진 기자
저작권자 © SBC 서울불교방송 불교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