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봉정사 지조암에는 기와그림을 그리는 귀일(歸一·속명 장은호·46)스님이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사찰 기와그림의 맥을 홀로 이어온 그가 4월 3일 봉정사 입구에 기와그림 전시관 ‘만휴(卍休)’를 개관했다. 버려진 기왓장을 도화지 삼아 오방색 천연안료로 길상문양을 입혀 불화 만들기를 신행으로 일삼은 지 10년이 넘는다.

경전을 읽고 공부에 매진하느라 한동안 붓을 놓았던 귀일 스님은 10년 전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사래(지붕의 네 귀퉁이) 막새기와그림을 본 순간 독특한 색채와 아름다움에 빨려들었다. “일종의 작은 벽화였죠. 추녀 끝에 매달아 악귀를 쫓던 기와그림의 빛 바랜 인물화가 나를 사로잡았어요.”

그러나 현존하는 기와그림은 통도사의 두 점밖에 없어 재현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전국의 사찰을 오가며 탱화와 단청을 스케치하여 낡은 고와(古瓦) 위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헐고 깨진 기와마다 맞는 그림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색이 다름을 알면서 흥미가 더하였다. 담묵의 선화(禪畵)를 즐겨 그리던 그였으나 기와그림을 만난 뒤로는 화려한 원색이 좋아졌다. 귀일 스님의 화재(畵才)를 일찍부터 눈여겨본 명지대 미술사학과 이태호 교수는 “스님이 선화가로 가지 않고 수준 낮은 응용미술로 여기기 쉬운 채색화를 택한 점은 대중적으로 낮아지는 하심(下心)의 일이자 부처의 세계를 나눠갖는 신행의 발로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기와그림이 알려지자 각계에서 전시 요청이 이어졌다. 2002년 대구 인터불고호텔 개인전, 인사동 가나아트화랑 개인전, 한국공예문화진흥원 초대전을 열었고 2003년 몽골에서 열린 몽골문화관광부 초대전에도 작품 20점이 건너가 호평을 받았다.

지금까지 가진 전시회만 7차례. 무거운 기왓장을 들고 다니기에 지친 그는 그동안의 전시회 수입금으로 전용 전시관을 짓기로 큰맘을 먹었다. 김휘향 안동시장으로부터 문화사업지원금 1억5000만원을 지원받고 은행융자와 기부금까지 합쳐서 총 8억원을 투자한 으리으리한 팔각정 목조건물을 지었다. “소나무로 된 아름다운 전시관을 짓고 싶었습니다. 기와그림을 보러 오는 분이 목향도 맡고 차도 마시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자꾸 욕심을 내다보니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대림대 건축학과 심명섭 교수가 기본설계를 맡고 내부는 귀일 스님이 친한 목수와 손수 마무리했다. 대들보 서까래부터 창틀, 난간, 댓돌까지 온통 소나무로 지었다. 1년간 꼬박 전시관을 짓는 데 매달린 시간도 그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틈틈이 대장간 일을 배우기도 했다. “대장쟁이, 독쟁이, 환쟁이, 다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죠. 옛날에는 가장 천시되었던 게 쟁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에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요. 우리의 전통공예가 너무 없어요.”

굵직한 경상도 사투리로 상말도 곧잘 하는 귀일 스님은 재미있을 만큼 세속적이다. 찻집을 겸한 그림전시관 만휴에서 혼자 조용히 듣는 노래는 독경이나 국악이 아닌 김상희 남진 문주란 등이 부르는 가요다.

세속의 미련을 못버렸음일까 세상사에 불만도 많다. 성철 큰스님이 입적했을 땐 무덤덤하더니 교황 서거에 난리치는 언론과 국민이 야속하다. 양양화재로 소실된 낙산사 동종 같은 신성한 승보물을 문화재청이나 미술가들이 미술적 가치로만 저울질하는 것도 불자의 한 사람으로 참담하다. “기와그림에 예술혼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나의 작은 불심이 있을 뿐이지요. 옛 절은 돈이 아닌 불심으로 이루었습니다. 흙을 빚어 기와를 구운 것도 불심입니다. 우리가 신라미술을 재현하지 못하는 것은 기예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때처럼 지극한 불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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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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