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편. 《 지식보다는 지혜를 닦으라 》


일반적으로 상식이란 애매하고 부동적이며

지식은 명석하고 확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지식과 상식 사이에 뚜렷한 금을 긋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식의 순화에 의한 지식도 있으며

반대로 과학적인 지식으로서 그것도 상당히 고도의

지식이 상식화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또 지혜로부터 구별되기도 한다.


과학적 지식으로 대표되는 소위 이론적 지식은

아무리 집적(集積)되어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지 않는다.

해답을 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지식과 지혜의 구별은

그다지 명확한 것이 아니다.

생활의 지혜를 얻는 데에는 지식도 필요할 것이고

윤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도

독선적으로 되지 않기 위해서는

철인(哲人)이 저술한 책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지식이 가끔 신앙으로부터 구별된다.

이 경우 지식은 그리스적인

이성적 지식을 원형으로 하고,

신앙은 헤브라이적인 종교적 신앙을

원형으로 하지만, 서양 사상은 이 양자가

서로 뒤얽혀서 성립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도 지식과 신앙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곤란하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교의나 신학은

신앙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그 자신은 또 지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의 정으로서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알려지는 일체를

지식이라고 부른다면 그 속에는

상식도 지혜도 종교의 가르침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에게서

이 세상에서의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이 보다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비록 그것이 무엇이든,

세계와 세계의 지식을 초월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비로소 이 세상에서의

지식의 의의와 한계가 명백하게 되고

지식과는 다른 지혜나

신앙의 소산이 다시 확인될 것이다.


지혜란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며

제법에 환하여 잃고 얻음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미혹을 소멸하고 보리를 성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 히브리 사상에서는

지혜의 특성을 근면, 정직, 절제, 순결,

좋은 평판에 대한 관심과 같은 덕행이라고 본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경전에 대한 지식이

아주 해박했던 뽀띨라라는 비구에 대한

일화를 말하려고 한다.


뽀띨라는 나이가 많고 출가한지도 오래된

장로 비구로서 다른 비구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도하는 강사였다.


그는 스스로 학식이 높으며 법을

잘 설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대단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뽀띨라를 보시고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저 뽀띨라 비구는 여래가 설한 가르침을

머릿속에 모두 기억하고 있구나.


그러나 아직도 정작 자신의 마음을 밝혀

나고 죽음이 되풀이되는 윤회의 고통을

정작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여래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일깨워 주리라.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그때부터

뽀띨라를 보실적마다 이름 앞에

‘뚜짜’라는 말을 붙여 부르셨다.

뚜짜란,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란 뜻을 가진 말이다.


‘뚜짜 뽀띨라여. 이리오라.’

‘뚜짜 뽀띨라여. 여기 앉으라.’

‘뚜짜 뽀띨라가 공양을 하는구나.’

등등 여러 사람 앞에서 말끝마다

뚜짜를 붙여 부르셨다.


이렇게 부처님이 자신에게 머리가 텅 빈

멍청이 같다는 뜻을 지닌 별명을 붙여 주시자

뽀띨라는 혼자 생각했다.


나는 삼장을 모두 외우고 경의 철학적인

해석도 가능하며 또 설법도 아주 잘하여

오백 명이나 되는 비구와 열여덟 무리의

비구들의 스승 노릇을 해왔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 나를 가리켜

‘뚜짜’라고 부르시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내가 참된 수행으로 마음을 고요히 다스려

선정 삼매를 얻지 못하고 밝은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책하고는 마침내 조용한 숲속으로 들어가

일간 좌선 수행에 매진하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날 저녁에 조용한 수도원에 가게 된다.

그곳에는 약 서른 명의 도가 높은 비구들이

수행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아라한의 경지를

증득한 최고의 성자들이었다.


뽀띨라 비구는 수도원의 원장 격이 되는

비구를 만나 인사를 드리고 자기의 수행을

지도해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자 그 원장 비구는 깜짝 놀라며

“아니 대덕 비구께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께서는 세상이 다 아는 대강사 아니십니까.”

“오히려 저희가 뽀띨라 강사님에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뽀띨라 비구는

“아닙니다.”

“그런 말씀마시고 제발 저의

의지처가 되어 주십시오.”하고 거듭 청하였다.


사실 이 수도원에 머물고 있는 비구들은

도를 성취한 까닭에 누구든지 뽀띨라의

수행 지도를 해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원장 비구는 일부러

“이 뽀띨라가 비구는 학식이 많기 때문에

자만심도 높다. 나는 먼저 이사람의

자존심을 꺽어 놓으리라.“ 생각하고는

자기가 직접 그를 지도해 주지 않고

손아래 비구에게 내려 보냈다.


그런데 수행지도를 부탁 받은 그 비구 역시

다시 손아래 비구에게 그를 보냈고

그런식으로 뽀띨라는 계속 손아래 비구들에게

보내져서 맨 나중에는 결국 수도원에서

가장 나이어린 겨우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사미에게 오게 되었다.


그래서 기고만장 하던 뽀띨라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밟혔다.

이때 뽀띨라의 스승이 된 어린 사미는

오후 반나절 동안이나 뽀띨라를 보고도

본체만체 실로 무엇인가를 꿰매면서

자기일만 계속하는 것이었다.


뽀띨라는 여러 아라한 비구들을 거치면서

겸손한 태도를 익히게 되었기 때문에

자존심을 내던지고 어린 사미에게 공손히

합장 공경을 표한 다음 이렇게 애원 했습니다.

“스승이시여, 저의 의지처가 되어 주십시오.”


이 모습을 본 사미는

“뽀띨라 스님 당신께서는 저의 훈계와

정책을 달게 받으시겠습니까?“

“저는 스승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하렵니다.”

뽀띨라 비구가 이렇게 말하자 사미는

거기서 멀지 않은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가사를 입은 채로 저 연못에 들어가십시오.”


사미는 뽀띨라가 아주 고급스러운 가사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던

뽀띨라는 사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못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미는 웃으며 가사자락이 몽땅 젖어서

기어 나오는 뽀띨라를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뽀띨라 대덕님, 만약 여기에 여섯 개의

구멍이 나있는 거미집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거미집에 도마뱀 한 마리가 거미를

잡아먹으려고 기어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때 당신께서 만약 도마뱀을 잡아

먹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럴려면 여섯 구멍 중 다섯 개는 다 막고

한 구멍만 남겨둔 다음 그 구멍을 잘 관찰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대덕님 수행도 이와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다루는데 있어서

눈, 귀, 코, 혀, 몸이 물질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을 따라 가지 말고 다 막아 버리고

오직 마음의 문 하나만을 자세히 집중해서 관찰하십시오.

끈기 있고 열성적으로 이와 같이 수행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뽀띨라는 이미 많은 경을 배워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사미의 가르침을 즉시 이해하였다.


그것은 마치 잘 준비된 등잔에 불을 붙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스승이여, 그 말씀으로 이미 충분합니다.”라고

말하고 곧장 한적한 곳에 앉아서 자기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뽀띨라가 그와 같이 수행을 하고 있을 동안

부처님께서는 뽀띨라 비구는 이제 자신이

마음의 흐름을 집중적으로 관찰하여

모든 법의 성품을 바르게 깨달아 가고 있구나.


그는 이제 곧 위대한 지혜를 갖춘

대덕 장노가 되리라 하셨다.


이 일화는 <법구경>에 나오는 내용으로써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불교의 목적은 지혜를 깨닫는 데 있지

교리적 지식이나 이론의 해박함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교법은 지혜를 얻어

해탈의 공덕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수행이다.


옛날 큰 스님들께서는 항상 불경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글자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 수행을 할 것을 강조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설법은 강을 건너게 하는 뗏목과도 같은 것이니

방편으로 의지는 할지언정 머무르지는 말라 하셨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유서 깊은 명산 대찰을 찾게 되면

절 입구에 ‘入밥버 법법 법버 법법’ 하라는

문귀를 보게 되는데 그 의미를 살펴보면

‘이 절 문안에 들어서는 사람은 누구든지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을 모두 버려라.‘ 라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불교는 수행이 으뜸이므로

절이나 불교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했더라도

반드시 마음을 깨닫는 수행을 몸소 실천 해야만 된다.


절에 가서 불공 좀 드리고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쯤

따라서 외우는 일만 가지고는 불법의 전수를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아무리 바쁘고 힘들다 하더라도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만이라도 짧은 시간이나마

조용히 앉아서 좌선하는 습관을 꼭 가져 봅시다.



나무관세음보살



제 34편. 《 화무십일홍이요. 인심은 천심이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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