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편. 《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 》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

일일부작 백일불식(一日不作百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그날 먹지 않는다는

중국(당)나라의 회해선사(懷海禪師)가

실천한 옛 이야기이다.

 

일일부작 백일불식

이는 농부가 하루 일을 쉬면

백일 동안의 양식을 잃는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없으면 나중에 곤란을 받는다는 말로

제철을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때가 있는 법이다.

공부할 시기에는 배워야 된다.

일할 나이가 되면 열심히 일해야 된다.

하루를 사는 일이라는 좋은 글씨가 있다.

 

순간을 사는 일이 하루를 만들고

하루를 사는 일이 한생을 이룬다

하루를 사는 일을 마지막처럼 정성을 다하고

하루를 사는 일을 평생을 사는 일처럼 길게 볼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의 시간을

의미 없이 낭비하고 뒤늦게

지난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르게 한 번 살아 볼텐데 하며

후회하고 아쉬워합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살아볼 수 없는 시간

순간의 시간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한다.

 

하루를 사랑으로 사는 일이란

너그러워지고 칭찬하고 겸손하고

진지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를 사랑으로 끝내는 일은

반성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한다.

 

소승은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선구자

회해선사를 소개코져한다.

 

백장산 대지회해선사(百丈山 大智懷海禪師)는

중국 선(禪)사상의 가장 거물이었던

마조선사의 수제자로서 성은 왕씨이며

복주 장락현 사람으로서 15세에 출가하여

삼장을 익혀 통달하였고 그가 차지한 선사상의

지위는 매우 크다.

백장선사 이전의 승려들은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걸식(탁발)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본래 인도에서는 승려들의 농사일을 금지하였다.

김매거나 밭을 갈 때 곤충을 다치거나

죽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제도는 인도와 같이 야자 같은

과일들만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는

열대지방에서는 적합할런지 모른다.

 

백장선사의 청규는 이러한 기생적인

풍조를 없애려던 것이었다.

왜 멀쩡한 사지를 가진 승려가

기생충처럼 속인의 피땀을 빨아 먹어야 되는가.

때문에 그는 모든 승려는 하루에 얼마 동안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갈도록 하였다.

 

승려들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에 의해

생활할 수 있게 하고 보시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하였다.

 

그는 방장 노릇을 할 때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일하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는

그의 좌우명은 각 종파 승려의 금언이 되었다.

 

백장선사는 94세를 살았다.

그가 말년에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킨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제자들은 그가 연로 하였으므로

일을 못하도록 권유하였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하는 수 없어 그가 쓰던

연장을 감추어 버렸다.

없어진 연장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그는 단식을 하였다.

 

일하지 않았으니 안 먹는 다는 것이었다.

도리 없이 제자들은 그 연장을 도로 내주었다.

우리는 백장선사를 단지 사원제도의

개혁자라고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그가 노동을 강조한데에는

깊은 정신적 의미가 있으며

또한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연대의식을 수반하고 있다.

 

그는 마조의 사상을 이어받아

초월적으로 내재적인 절대에 관심을 두었다.

 

그에게는 초월에 대한 일면의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이 절대의 본체를 둘로 나누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본체를 형이상과 형이하의

양자를 포괄한다고 믿었다.

이점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곧 그가 늙은 여우를

구도하게끔 도와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비록 신화적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뜻을 지니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장선사가 단에 올라 설법할 때마다

낯선 한 노인이 대중들에게 끼어

법당에 들어와 강론을 들었다.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으나

이 노인만이 남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백장선사가 누구냐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사실 인간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존자때 이 산의 방장이었습니다.

어느 학인이

수행을 높이 쌓은 자도 여전히

인과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고 묻길래

저는 그런 사람은

지배당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 때문에 저는 벌로 여우가 되어

오백세나 살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저로 하여금 여우의 탈을 벗도록

옳은 말씀 한마디만 하여 주십시오.

 

백장선사의 대답은

당신이 먼저 질문하면 답변해드리리다.

 

노인이 그 학인의 질문을 되풀이하자

백장선사는 대답하였다.

 

당신은 마땅히 인과의 법칙에 불매 영향을 입어

현혹되지 않음이라고 했어야한다.

 

노인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는 백장선사에게 절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이미 여우의 탈을 벗었습니다.

저는 이 산의 저쪽 기슭에 살고 있으니

바라옵건대 저를 죽은 승려의 장례의식에

따라 묻어 주십시오.

 

백장은 절의 총무 스님을 불러 식사 후에

곧 장례식을 거행하겠으니 대중에게 알리라 하였다.

대중은 깜짝 놀랐다.

절에는 아무도 앓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식사를 마친 뒤 백장선사는 그들을 데리고

뒷산의 동굴로 가서 여우의 시체를 찾아내고

예에 따라 화장을 하였다.

 

그날 저녁 모임에서 백장선사는

그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여우 이야기가 지닌 뜻은 분명하다.

참으로 도를 깨친 사람은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

 

요즘 우리 사회는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가

심해지고 있다.

 

빈익빈이란,

가난할수록 더욱 가난해짐을 뜻하며

부익부란 부자일수록 더 부자가 됨을 뜻한다.

 

기독교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13장 12절과

25장 29절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무릇 있는 자는 더욱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리라.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빈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서

무조건 빼앗아 부자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부자는 재산을 불리는

능력이 있으니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

부자에게 줘야 전체 재산이 더욱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처음부터 가난한 것이 아니라

재산을 불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하여도

취직이 더 어려워지고 전문대학을 들어가

기술직 취직이라도 원하지만

일자리 얻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일자리가 없다하여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것이 아니다.

옛말에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던 찾아서 땀을 흘려라.

그리고 도전적 정신을 늦추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문은 두드리면 열리는 법이다.

기억하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것을

 

관세음보살.

 

 

제 31편. 《 불교는 민족의 등불이다 》로 이어집니다.






SNS 기사보내기
법천스님
저작권자 © SBC 서울불교방송 불교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