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편. 《 범하나 심오한 한마디 진리 》

 

지금 일본은 누가 뭐라고 해도 경제적으로는 우리 보다 앞선다. 그러나 인간이 빵만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던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더 낫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의 물질이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잠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니 조금 더 잘사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으랴!

 

여기서 일본을 돼지라던가 비하 시키자는 의도도 아니다. 다만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가 앞서고 불교도 우리나라를 통해서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은 현재 대처승이 다수이다.

 

이런 일본에 옛날 고승들이 한마디 씩 한 일언방담이라는 글이 있다. 가볍게 나누는 평범한 말 속에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 있다.

 

매우 천하게 여겨지는 목록에서는 불공드릴 때 좋은 공덕을 너무 많이 적어 읽지 말라는 것이다. 참으로 진리의 말이다. 만법이 하나로 귀일하는데 좋은 공덕이 왜 그리 많아야 하는가? 그렇게 하면 심리적으로 부담을 가지며 서둘러 짐을 싸서 떠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공을 드릴 때는 말도 반으로 줄이라고 말한다. 승려가 앉아 있는 주변에 너무 많은 도구들을 위세를 부리듯 진열하지 말라는 것이다. 벼루 통 안에 여러 자루의 붓을 넣어 놓거나 벼루나 먹을 많이 진열하여 자기를 과시하려 하지 말라는 것인데 먹물 장삼에 법을 먹고 사는 승려에게는 참 당연한 진리의 법이다. 수다나 떨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더욱 깊은 가슴에 와 닿는 법은 내세의 안락을 원하는 자는 훌륭한 물건을 가지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다.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더 갖고 싶으며 그러다 보면 욕망으로 일그러진다고 한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된 기분으로 살라는 것이다. 이러한 법을 행하며 살기는 범인으로는 힘 드리라.

 

세상이 하도 어수선 하다 보니 우리는 눈 만 뜨면 꼴불견 인간 군상들을 대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도 그런 꼴불견 군상들이 많았던 듯하다. 꼴불견으로는 공공연연하게 남녀 관계를 입에 담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참 흉물스런 군상들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는 남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 삼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꼴불견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꼴불견으로는 가난한 집 안에서 술잔치를 자주한다던가, 별 볼일 없는 신분이면서 점잖은 신분을 함부로 대하는 일이라 던지, 늙은이가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억지로 웃기려고 하는 일도 꼴불견으로 치부한다.

 

너무 평범하나 더 깊은 진리도 있다.

할까 말까 망설이는 일은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 생각하는 이런 일은 이번만 하자, 아니 한번 만 하자고 해 놓고는 후회하게 되니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다.

 

세상사는 사람들에게 삼가고 지켜야 할 일들이 어디 한 둘 이겠는가?

 

전혀 배움이 없거나 식견이 짧은 사람이 학문이 높은 사람 앞에서 위인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아는 체 하면 안 된다. 본인이 듣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른 채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일, 사람이 술에 취해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일이라던가, 예쁘지도 않은 자기 자식을 여러 사람 앞에서 칭찬하는 일도 삼가라고 했다.

 

한 줌의 바람에도 한 발자국에도 진리와 법은 살아 있으며 항상 가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최고의 해탈자이다. 등불을 밝혀 과일을 익히려는 우는 버려야 한다.

 

나무관세음보살.

 

 

다음은 제 18편. 《마음이 일어나는 가정교육을 시켜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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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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