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편. 《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

 


조선시대에 가장 청렴하고 유능한 재상으로는 단연 황희 정승과 맹사성 대감을 꼽는다.

 

이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였다. 어느 날 맹사성 대감이 황희 정승 집에 가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두 여종이 씨근덕거리며 달려왔다.

 

그들 두 여종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겨댔다. 한 여종의 말을 다 들은 황희 정승은 ‘그래, 네 말이 옳다’고 했다.

 

다른 여종이 울면서 호소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맹사성 대감이 아니 영상 대감 한 쪽이 옳으면 한 쪽이 나쁘고 한 쪽이 나쁘면 다른 한 쪽이 옳지 어찌 둘 다 옳을 수가 있소?

 

그러자 황희 정승은 ‘대감 말도 옳소’ 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전부 옳은 것이 될 수도 있고 안 옳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사바세계에서 사는 방식도 다를 게 없다. 남이 나를 욕하며 헐뜯는다고 해서 같이 싸워서는 안 된다. 손바닥이 마주치니 소리가 나는 법이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를 만났고 상대 역시 나를 만났기에 비평하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비판 받을 일도 없다. 결국 잘못은 상대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나, 자기 자신에게 있다.

 

모든 인간관계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의 허물부터 들춰내려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무의 뿌리를 자르면 나뭇잎은 마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잘 보이는 잎을 자르려 한다. 잎을 잘라 내어야 뿌리는 죽지 않으며 더 많은 잎들이 돋아난다. 잎은 나무의 피부이며 살이다. 어떤 상처에도 새 살은 돋는 법. 하나의 잎을 잘라내면 뿌리는 세 개 네 개의 잎을 돋아 내게 한다.

 

이와 같이 분노를 잘라내면 그 대신 전보다 세 배, 네 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잎을 따내려하지 말라. 분노, 시기, 질투 이들로 인해 괴로워하지 말라. 나무의 뿌리를 자르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동일화(同一化)가 뿌리이다. 시기, 분노, 질투가 하나 되어 버리는 것,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은 잎에 해당하는 것이려니 마음의 뿌리를 자르고 동화를 끊어 버리는 순간 윤회의 깊고 깊은 여행은 끝난다.

 

램프의 불꽃이 수백 만 삶의 어둠을 어떻게 몰아 낼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말라 어둠에는 농도가 없다. 어둠은 그 자체의 원소가 없다. 한 순간의 어둠이나 오래된 어둠이나 어둠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빛은 물질이다. 원소다. 무엇인가 실제하는 상태이다. 빛의 실체가 있을 때 어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 사라져야할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어둠이란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빛의 부재(不在)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불을 켰을 때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에 불을 켜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면 옳고 안옳고 가 없어 진다. 진리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였던 것을 다시 발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있을 때 그것이 거기 처음부터 있었다. 당신이 인간의 삶 속으로 태어날 때 진리가 당신과 함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참선하자.

우리의 삶을 더욱 살찌우기 위하여 참선하자. 참선은 지켜보는 것이다. 참선은 존재와 전혀 다른 것이다.

 

참선은 해야 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은 만족을 모른다. 그래서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이나 욕구는 끝이 없다. 얻으면 얻을수록 더 얻고 싶고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욕망이 타오르는데, 사실 존재의 본질에서 볼 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유하면 할수로 더욱 불행해 진다. 만족이란 걸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이 소유욕을 털어 내면 그리고 모든 범사에 감사하고 만족을 느끼면 내 것도 네 것도 다 옳게 보인다.

 

나무관세음보살.

 

 

제 10편. 《 있어야할 곳에 있는 것이 법이다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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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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