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편. 《 책임과 의무는 권리는 삼위일체 》

 


어느 산골 마을에 목장을 지키는 개가 있었다.

 

산 속에서 몹시 배가 고픈 늑대가 개에게 다가와 달콤한 말로 속삭였다.

 

너희 개들은 생김새가 우리와 비슷하니 어쩌면 우리는 한 조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로 으르렁 거릴게 아니라 형제처럼 지내면 어떻겠니? 우리 좀 봐라. 얼마나 자유롭게 살고 있니.

 

그런데 너희 들은 무어냐? 주인에게 묶여서 노예처럼 살고 있지 않느냐. 거기다가 걸핏하면 두들겨 맞고 양떼들을 지키려면 또 얼마나 힘드냐? 그런데도 너희에게 돌아오는 건 무어냐, 사람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 그것도 마음껏 먹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문을 열고 양떼를 나에게 넘겨다오.

 

개들은 달콤한 늑대의 설득에 속아 목장의 문을 열어 주었다. 목장으로 들어 온 늑대는 아무런 준비가 없는 개부터 물어 죽였다.

 

개에게는 목장을 지킬 책임과 의무가 있는데 그것을 다하지 않은 개에게 내려진 결과였다.

 

사람들은 잘되면 내 덕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식으로 의무나 책임은 회피한 채 권리만 주장한다.

 

처녀가 임신을 해도 할 말이 있고, 일 못하는 소멍에 탓만 하며, 글 못하는 사람이 필묵 탓하고, 시험에 떨어지면 운수가 사나워서 그랬다고 하며, 장님이 길가다가 넘어지면 지팡이 탓으로 돌린다고도 한다.

 

우리의 삶에 언저리에 깊게 뿌리내린 책임 회피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들이 이것뿐인가?

 

잘 살면 내 복이고 못 살면 조상 묘 자리 탓하고, 밥이 질면 늦잠 잔 며느리 탓이라고도 한다. 어떤 일이 잘못되거나 손해를 보았을 때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게 아니라 외부적 탓을 찾으므로 그 책임과 잘못 맞은 화살을 외부나 타인에게 돌리고 있느니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의식구조는 반드시 고쳐지고 새로워져야 한다. 법에서도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는 보호 받지 못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는데도 뿌리와 줄기와 잎 사이에서 상호 협력 하에 탄소동화 작용을 할 때만 가능하다. 인간 사회에서 어찌 잘못되는 일이 남에게 외부에만 있다고 하겠는가?

 

성공이나 하나의 완성에는 일백 프로 최선을 다하는 의무와 책임, 그리고 그 뒤에 권리가 수반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우선 공을 외부에 돌려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후 무엇이 성공하게 하였는가를 알아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지혜로움이 우선이다.

 

실패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는가?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가 알아내고 반면교사로 삼아야지 다시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어느 대학교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한 구절이 있다.

 

어둑한 새벽에 과외수업을 받으러 급히 하는데 수첩이 하나 떨어져 있더란다. 주워보니 새 수첩이라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고 “누구나 인생에서 한 두 번의 실패나 실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일에 두 번 실패하는 자는 바보이다. -명숙-” 이라고 만 적혀 있더란다.

 

자신은 이 말을 평생의 귀감으로 삼고 같은 일에 두 번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대학의 훈장 밖에 되지 못했다는 글이다.

 

당시 그 글을 읽고 대학교수 된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구나 생각했지만 같은 일에 두 번 실패하거나 실수하지 않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 그리고 매사에 세심한 주의 속에 최선을 다 한다는 사실은 가슴에 새겨둘 일이다.

    

 

나무관세음보살.

 

   

 

다음은 제 8편. 《 스님, 정치 한번 하시지요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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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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