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와 수행>


성도절은 불교의 사대 기념일 가운데 하나인데, 어느 기념일 보다도 더욱 뜻깊은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란 곧 ‘성도한 사람’을 뜻하고, 인간 싯다르타에게 성도라는 한 과정이 없었다면 불교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이 무엇입니까?

성불 아닙니까? 성도는 곧 성불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성도는 곧 우리 모든 불자의 궁극적인 소망이요, 성도절은 우리의 이 소원을 역사상 최초로 성취시킨 날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는 석가모니 부처님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범부들도 수행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도와 수행’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성도절의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성도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엄밀하게 말하면 수행자 고타마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신 날, 즉 성도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음력으로 납월 8일, 지금부터 약 2천 6백여 년 전 일입니다.


성도절 이전의 석가모니는 부처님이 아닌 평범한 사람, 정반왕의 아들 고타마 싯다르타였습니다. 비록 왕궁을 버리고 6년이라는 긴 세월을 온갖 고행을 겪으시며 수행하셨지만 수행자 고타마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를 통해서 석가모니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싯다르타가 아니라, 여래․응공․정변지․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라는 십호를 구족한 역사상 최초의 부처님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는 곧 성불과 같은 말입니다.

성도의 ‘도(道)’는 ‘길 도’자로 이 길은 곧 진리를 뜻하는 말이요, ‘성(成)’은 ‘이룰 성’으로 무엇을 완전하게 ‘이룩했다, 완성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도에 있어서의 완성은 다른 세속적인 어떤 일의 완성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완성했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인연을 한 곳에 모음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빌딩을 완성했다고 할 때는 기초를 쌓고 철근이라 콘크리트 등 여러 가지의 재료를 순서대로 조립해서 건물을 완성합니다.

그러나 ‘성도’에 있어서의 진리의 완성은 빌딩을 지을 때처럼 무언가를 보태고 합해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적인 자각, 즉 진리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진리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다른 말로 하면 ‘깨달음’입니다.


부처란 말도 역시 이 깨달음을 뜻합니다. 부처를 범어로는 ‘붓다’라고 하는데 붓다는 곧 깨달음, 한자로는 깨달을 각(覺)입니다.

바로 여기에 불교의 핵심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도절의 깊은 의의가 있고, 여기에 불교의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주를 만들었거나 우주나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오직 ‘진리를 깨달은 분’으로 우리의 스승일 뿐입니다.


<잡아함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그 누가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의 존재와 무관하게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깨달음을 완성한 뒤에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해서 연설하고 이를 드러내 보이시니,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로 이 진리, 도리를 깨달으신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절을 기점으로 ‘깨달은 사람’인 부처가 되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첫째,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온 우주와 그 우주마저 초월하는 대진리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 준 것이 됩니다.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라면, 석가모니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 가능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뜻, 이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하는데, <묘법연화경>에서는 이를 ‘개시오입’이라는 네 글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우주의 진리를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에게 열어 보이는 것이 한자로 ‘개시(開示)’요, 이를 본 중생들로 하여금 자신처럼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오입(悟入)’입니다.


우리가 인사말로 ‘성불합시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겉치레로 하는 덕담이 아니라 바로 우리 불자의 궁극적인 목표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고 성도하신 근본 목적이요, 불자들의 지상과업입니다.


둘째, 부처가 ‘깨달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든 종교가 설정해 온 신(하느님)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킨 것이 됩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 안이란 뜻도 있습니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다’고 하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기 이전의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신의 존재를 믿었고, 사람은 이 신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롯하여 우주 만물을 창조한 어떤 위대한 존재는 단지 창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고 또 상과 벌을 주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신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궁극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기독교에서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대속설(代贖設)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람들 자신이 바로 운명의 주재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나에 관한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을 뿐이어서, 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모범이요, 교사일 따름이며,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있다면 자기의 수행뿐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성도절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둘째 성도란 성불과 같은 말이고, 부처란 ‘깨달은 사람’을 뜻합니다.


섯째 부처가 깨들은 사람이란 사실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제 어떤 방법으로 성도, 즉 성불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는 그 종교에서 내세우는 어떤 신의 가르침이나 계시를 빋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이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게 하는 것, 즉 모든 인류가 성도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에 불자는 모름지기 성도를 최후의 목적지로 삼고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비록 목표지점에 도착하지 못할지라도 목적의식만은 항상 간직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불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깨달음을 얻어서 성불할 수 있는가?

깨달음을 얻는 데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앉아서 있으면 깨달음이 옵니까?


깨달음에 필수적인 것은 수행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금생에서만도 6년이라는 기나긴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우연히 신의 계시를 받아서 부처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잠을 자다가 문득 꿈 속에서 어떤 신령이 나타나 부처로 만들어 준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부처가 되셨습니다.


부처님의 수행은 단지 금생의 수행만이 아닙니다. 과거세에도 한량없는 세월동안 끊임없는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그 공덕으로 금생에 성불하신 것입니다. 지난해에 입적하신 성철 큰스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끊임없는 수행이 없이는 성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수행이란 산속의 스님네들, 선방에 앉아서 정진하는 스님들이나 하는 일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철 스님의 입적 이후에 수행은 장좌불와나 묵언 등과 같은 고행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은 산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만일 산속에서만 가능하다면 불교는 단지 몇몇 산중 스님네들만을 위한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분들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이 땅에 태어나셨고 성도하셨고 45년간 중생교화에 심혈을 기울이셨던 것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도는 불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무문이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문이 없다’는 뜻이지만, 속뜻은 ‘따로 정해진 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꼭 이 방법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특징의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없는 문’을 통과하는 데도

수생만은 필수적입니다. 수행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수양입니다. 이 수행을 통하지 않고는 비록 특정한 문이 없지만 결코 그 문을 통과해서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필수적 요소인 수행을 크게 세 가지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심성수행이요, 둘째는 학문수행이요, 셋째는 실천 수행입니다.


첫째 심성수행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본체를 밝혀 우리네 성품의 근원을 찾아내는 소위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말합니다.

<화엄경>에 ‘보관일체중생(普觀一切衆生)하니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라.’ 곧 ‘모든 중생을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을 갖추고 있다.’ 하셨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가운데 이미 부처의 성품 즉, 불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불한다든가 성도한다든가 하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인격을 수행을 통해서 새로 완성ㅇ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미 간직되어 있는 자성을 되찾는 것일 뿐입니다.

또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종종환화(種種幻化)가 개생여래원각묘심(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하셨는데, ‘모든 중생의 갖가지 허망한 생각들도 모두가 여래의 원만하게 깨달은 묘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두 말씀을 종합하면, 우리 중생들은 모두가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 즉 깨달음의 성품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온갖 번뇌 망상이라는 것도 바로 이 불성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원각묘심인 불성에서 번뇌 망상과 같은 온갖 잡된 생각들이 일어나는가? 그 까닭은 불성이 욕심에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저 높고 푸른 하늘의 찬란한 태양광을 먹구름이 차단함으로 인해 그 빛이 지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마음의 검은 구름인 욕심을 걷어내는 수행이 바로 심성수행입니다. 탐진치 삼독심을 걷어내는 작업, 이 작업을 통해 성도에 이르는 수행이 심성 수행입니다.


둘째의 학문수행은 보통 세간에서 말하는 학문수양과는 다릅니다. 세간의 학문은 지식을 넓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방편으로서의 학문은 세간의 지식을 넓히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마음을 밝혀서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 대한 공부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학문을 위해서 학문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통해서 마음을 밝히기 위한 수행입니다.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참선을 잘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염불을 잘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학문을 연마하는 것입니다.


불교 교리를 공부한다는 것도 그 궁극절인 목적은 마음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불교 교리에 밝고, 선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이 자신의 마음을 밝혀서 성불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학문수행이 안입니다. 같은 학자라도 그 학문을 통해서 그와 같은 목적에 근접할 수 있으면 학문수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학문은 수행의 하나가 아니라, 생계수단을 위한 직업적인 지식의 연마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팔만대장경>은 바로 이 학문수행을 위한 보고입니다. 경전공부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성불하는 수행, 이것이 학문수행입니다.


끝으로, 실천수행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온갖 것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선이 좋은 줄 알고, 자비행이 좋은 줄 알아도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구두선(口頭禪)이란 말도 있습니다.


참선은 스스로 마음을 관조하는 것인데, 입으로만 선에 대해서 이야기 할 뿐 마음 닦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한낱 구두선에 불과합니다. 염불도 마찬가지, 염불이란 진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인데, 입으로만 부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는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성불을 목표로 수행하는 사람을 일컬어 보살이라고 하는데, 보살이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는 육바라밀이 있습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혜, 성정바라밀, 이 육바라밀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불자 여러분!

성도절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부처님이 되신 날입니다. 그러나 성도절의 진정한 의의는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날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 중생들도 범부에서 부처로 일대변신을 하지 않으면 성도절은 단지 하나의 기념일에 머물고 맙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상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범부로 머물러 있는 한 행복은 항상 저 멀리 존재하는 피안입니다. 부처가 되는 일만이 영원한 행복을 획득하는 길입니다. 범부가 부처님이 되는 길은 수행입니다.


우리 다 같이 수행을 통해서 성불에 이르도록 정진합시다.


일년에 단 하루 납월 팔일만을 부처님의 성도절로 기념할 것이 아니라, 일년 삼백육십오일이 우리들 모두의 성도절이 되도록 힘써 수행합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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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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