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문화재단이 스님의 탄신일을 앞두고 12일 제1회 김일엽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사진제공=김일엽문화재단.


한국 제1세대 여성작가이자 최초의 신여성이었던 김일엽 스님(1896~1971)을 추모‧선양하는 첫 번째 학술대회가 12일 한서대 연암도서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다.

김일엽문화재단이 ‘김일엽 개관과 앞으로의 연구 및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개최하는 행사에서는 ▷방민호 교수(서울대)가 ‘김일엽은 누구인가’ ▷유진월 교수(한서대)가 ‘김일엽과 콘텐츠 활용 방안’ ▷박진영 교수(아메리칸대)가 ‘김일엽: 여성과 불교철학’ ▷김광식 교수(동국대 특임교수)가 ‘김일엽 불교의 재인식’ ▷김주리 교수(한밭대)가 ‘김일엽 문학의 연구방향에 대한 고찰’을 발표한다.

다음은 김일엽문화재단이 소개하는 일엽 스님.

 

일엽스님(1896 -1971, 본명 김원주)은 근대문학 태동기의 문학도(文學徒), 개화기의 여성운동가, 사상가이자 종교인이다. 스님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되게 관통되어 흐르는 것은 ‘정신의 투철함’으로, 스님은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항상 투철한 ‘자기 정신’으로 ‘자기의 소리’를 내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을 영위했던 분이다.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 이화전문, 동경 영화(英和)학교 등 신학문을 수료한 후 한국근세사 최초의 여류문인이자 여성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신여자>를 창간하고 ‘신정조론’과 ‘자유연애론’으로 대표되는 여성계몽운동을 전개,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 홀연히 만공선사의 법하(法下)에 출가, 귀의하여 선사로부터 직접 법(法) 인가를 받았다. 입산 후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스승의 뜻에 따라 절필하고 비구니의 총본산인 견성암 입승(入繩)직을 30여 년간 맡아 생애의 대부분을 ‘장좌불와(長座不臥)’ 등의 참선수행으로 일관하였다. 만년에는 산내암자인 환희대에서 10년을 주석하며 대중포교에 대한 열정으로 <어느 수도인의 회상>과 <청춘을 불사르고> 등을 펴내 세간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일엽 개인과 비구니 세계의 내면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던 이 책들에 대한 관심은 스님의 깊은 성찰과 사색의 세계에 매료되어 폭발적으로 팔려 나갔고, 비구니의 연애담쯤으로 책을 읽었던 사람들이 내용에 감화되어 입산을 하거나 불교에 귀의하는 등 사회적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다.

1971년 세수 76세 법랍 43세로 스님이 설립한 덕숭총림비구니선원에서 열반하셨다. 스님의 영정과 추모탑이 덕숭산 수덕사 환희대에 모셔져 있다.

일엽스님은 철학가이자 사상가로서, 삶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특유의 결단력으로 시대의 벽을 깨고 나가는 선각자적인 모습이었다. 중요한 인생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불법(佛法)에 있음을 알고 그는 주저 없이 입산(入山)을 결행했다. 스님의 입산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인생을 걸고 찾아 나서야 할 삶의 절실한 출발점이었다. 그는 현실 문제에 바탕을 둔 인간성 회복을 수행의 일차적 과제로 삼았고 나아가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인간 구제에 뜻을 두었다.

“나를 여윌 수 없는 나는 나를 만날 수 없으나 나와 연결된 남이니 생사고락을 같이한다.”며 항상 자비와 연민에 가득 찬 심경으로 세상을 대했다. 이렇게 뚜렷한 자기의 소리를 가진 까닭에 부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도 종교적인 집착에 머무르지 않고 깊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생명력으로 깨달음의 길을 알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1971년 1월 28일 새벽, 스님은 자신이 건립한 비구니 선원에서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세수 76세, 법랍 38세.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마지막 열반의 모습은 그토록 치열했던 자신의 삶조차 한 잎새의 운명으로 거두어 가는 것 같았다. 그의 삶이 성공적이었나 하는 일말의 세속적인 질문은 이제 부질없을 것이다. 오직 영원으로 이어지는 이 생(生)의 인연 속에서 일엽 스님은 근세 불교의 보기 드문 선승(禪僧)의 모습으로 우리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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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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