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납월팔일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신봉하는 까닭은 그 분이 인간으로써 위대한 삶을 사셨거나 또는 신으로 본래부터 존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과 우주의 대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도절일야말로 어느 명일보다 더 뜻깊은 명절입니다.오늘은 이 뜻깊은 성도절을 맞이하여 먼저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진리와 다른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가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고,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시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 것인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불교의 진리,즉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와 다른 종교에서 진리라고 주장하는것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시다.

성도절은 인간 싯달타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탈바꿈하신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붓다가 되신 날입니다.다른 종교의 신앙대상인 신이라고 하는 절대자는 절대자가 된 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본래부터 신으로 존재했다는 가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대상은 '여호와'라고하는 이스라엘 민족 고래의 신입니다.물론 기독교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주로 '예수 믿는다'로 하지만 예수는 여호와의 아들로써 권위를 가지는것이지 여호와라는 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여호와,예수,성령을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그런데 그들의 최고,유일의 신인 여호와라는 신이 어떻게 신으로써 능력을 갖추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없느니라'하는 성구구절은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즉 시작과 끝입니다.여호와 또는 예수가 바로 진리요,생명이지 다른 무슨 법칙이 없습니다.그러면 그 신,또는 여호와는 어떻게 하여 진리가 되었는가?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본래부터 그렇게 존재했다는 가설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기독교의 창세기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은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가설로부터 시작하는 종교와 불교는 그 출발이 전혀 다릅니다.출발이 다를뿐 아니라 그 결과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가설이란 실험을 통해 그 사실이 입증되어야만 진리성을 얻게 됩니다.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신학자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신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해도 아직 이를 증명할 만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물론 가설이 사실로써 증명되지 못했다고해서 그분들의 신앙,기독교자체를 부정하려 한다면 이는 잘못입니다.왜냐하면 불교 교리 가운데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과학만이 만능처방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진리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므로,가설로부터 시작한 종교와 진리로 증명된 사실로부터 출발한 종교는 그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만일 본래부터 그런 신(神)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상누각(沙上樓閣),모래위에 쌓은 고층빌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그러나 불교는 가설로부터 시작한 종교가 아닙니다.석가모니라고 하는 실존인물의 성도로부터,즉 석가모니라고 하는분이 깨달은 진리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진리는 부처님이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닫지못했다고 해도 그대로 존재하는 진리라는 점이 더욱 중요합니다.곧 가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잡아함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것도,그 누가 만든것도 아니다.그러므로 그것은 여래의 존재와 무관하게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깨달음을 완성한 뒤에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해서 연설하고 드러내 보이시니,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리인 신(神)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가설로부터 시작하는 종교와 불교의 출발점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았습니다.그러면 이제 어떤 과정을 어쳐서 인간 싯달타가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진리의 화신으로,진리와 동체로 탈바꿈하시는지 그 과정을 살펴봅시다.앞서 말씀드린것처럼 부처님은 본래부터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부처가 되셨습니다.그런데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부처가 되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것처럼 가설이 아닌 진리로부터 출발하는 실존적인 종교라는 점 외에도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주구에게나 부처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뜻하므로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인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다른 종교에서는 아무리 잘해보아도 신이 될 수 있는 길이 봉쇄되어 있습니다.오직 그 은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그러나 불교는 바로 누구나 진리의 체현자인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먼저 선각자인 석가모니부처님의 성도를 통해 그 방법,과정을 아는것이 최선의 방법이 되겠지요.석가모니부처님게서 성도에 이르신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단계가 있습니다.

 

1.인생에 대한 회의를 품으셨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의문은 생사문제였습니다.왜 인간에게는 생노병사라는 괴로움이 따르는가? 그것을 벗어날 길은 없는가? 보통 사람들은 이런 의문에 대해서 세가지의 길을 택합니다.신의 섭리로 치부하고 신에게 의지하는 경우와 누구난 겪는 일인데 고민한들 무엇하겠는냐,되는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자포자기형입니다.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 자체를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그러나 싯달타는 달랐습니다.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아무리 생각해도,누구에게 물어보아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2.집착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하셨습니다.

당시 인도에서 출가하여 수행하는 사람드이 있었습니다.가정을 떠나서 홀로 명상에 잠기거나 고행을 하면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싯달타도 그 구도의 길을 택하기로 작정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그 길을 선택하는데는 커다란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싯달타는 왕자였고,사랑하는 부인과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나고 죽는 일 보다 더 큰 일은 없다고 생각한 싯달타는 드디어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부친과 자식에 대한 미련마저 버리고 출가를 단행하십니다.이와같은 결심은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그러나 이같은 큰버림이 있으셨기에 마침내 깨달음이라는 큰 소득이 가증했던 것입니다.

 

3.시행착오를 거치셨습니다.

집을 떠나 그가 처음 찾아간 곳은 당시에 인도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사상가들이었습니다.그러나 그들에게서 싯달타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당시의 이름난 사상가들이 추구하는것은 생노병사의 근원적인 해결이 아니라 고행을 위한 고행,하늘에 태어나기 위한 수행 등 싯달타의 출가동기와는 달랐던 것입니다.결국 싯달타는 나란자라강가의 숲을 찾아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고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그러기를 6년,그러나 역시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유일한 소득은 고행만이 진리를 발견하는 최선의 길이 아님을 간파하신 일입니다.육체적인 고행만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음을 간파하시고 드디어 고행을 포기하셨습니다.그러나 생사대사의 해결을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나선것입니다.

 

4.마군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고행의 무의미함을 절실하게 느낀 싯달타는 강으로 나아가 몸을 깨끗이 씻고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한 우유죽을 받아 자시고 체력을 회복하신후에 드디어 마지막 결전을 위해 보리수 아래의 금강보좌에 앉으셨습니다.사생결단이란 이런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생사문제,인생과 우주의 근본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다시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시고 선정에 드셨습니다.차츰 지혜가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마지막까지 싯달타의 깨달음을 방해한것은 자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던 온갖 욕망들이었습니다.경전에는 이런 심적갈등을 마(魔)와의 투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인간의 욕망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애욕과 원한,경전에 등장하는 마왕이보낸 마녀와 마왕의 군사는 바로 싯달타,아니 모든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온갖 욕망을 극복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드디어 정각을 이루시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온갖 욕망이 사라지자 우주만상이 마치 거울속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자기 가운데 간직되어 있던 여러가지 신비스러운 능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여섯가지 신통력이 나타났고,십력과 십팔불공법,시무외법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한 지례로 십이인연법을 관찰하시자 인생과 우주의 온갖 이치를 완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고 출가의 원인이 되었던 생노병사의 원인과 결과,그 해결방법도 환하게 드러났습니다.그러는 가운데 새벽녘 먼동이 터올 무렵 마침 동쪽의 맑은 하늘에 떠오르는 샛별과 눈빛이 마주치는 찰나에 더할나위없이 큰 지혜의 광명이 나타나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시게 되었습니다.일체종지를 성취하신 것입니다.이것을 아누다라삼약삼보디,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하는데,부처님은  아누다라삼약삼보디를 성취하심으로써 범부에서 부처님으로 탈바꿈하셨던 것입니다.이를 일러 성도라하고 성도절은 바로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습니다.이는 역사적인,실증적인 사건입니다.그런데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불자들의 판단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이른바 구원불설(久遠佛設)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단지 금생에서만 부처님이 아니라 한량없는 과거세에 이미 성불하신 부처님이라는 주장입니다.이에 대해서는 묘법연화경에서 자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다른 종교의 신처럼 본래부터 부처로 존재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이미 과거,한량없는 오랜 세월 전에 수도하신 후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셨지만 중생들을 위하여 다시 이 세상에 한 범부중생으로 몸을 나투셨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으시고,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를 하여,온갖 고행을 하시고,마침내 성도를 하시는 과정을 되풀이 하셨을까? 하는데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부처님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2천6백여년전 부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셔서 성도에 이른 과정을 재연하신 까닭은 오직 다음과 같은 한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일대사 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는가?부처님께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도록 (開示悟入) 청정케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셨느니라." -묘법연화경방편품-

 

그러므로 탄생.출가.성도 등의 과정은 바로 중생들로 하여금 성불하도록 하려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그러므로 성도절 역시 그 방편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성도라는 연극을 연출하신것은

첫째는 누구나 성불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한 노파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본래 부처,본각(本覺)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누구나 부처입니다.그러나 이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중생노름ㅇ르 벗어날 수 없습니다.부처님께서는 이를 깨우쳐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둘째는 깨달음은 온갖 노력의 결과라는 것,즉 과정을 보이시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사람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위대함만을 이야기합니다.그러나 성도절을 통해서 우리는 부처님의 위대함만이 아니라 부처님처럼 우리도 무한한 정진을 통해 마침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것이 중요합니다.

 

불자여러분 !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즉 성도로부터 시작되는 종교입니다.이 깨달음은 부처님의 출세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즉 가장 근본적인 법칙입니다.부처님께서는 이를 깨달으시고 부처님이 되셨으므로 다른 종교의 신과는 그 출발부터가 다릅니다.부처님께서는 이와같은 진리를 이미 오랜 옛적에 깨달으시고 부처가 되셨지만 우리 중생들에게 참다운 삶의 길,붓다가 되는 길을 일러주시려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성도라는 과정을 반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가르치듯,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듯 성도에 이르는 과정, 방법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을 계기로 우리도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하고,성불이 하나의 가증성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정진이라는 피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성불하십시요.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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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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