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틀림없는 진리(三法印)

 

오늘은 삼법인(三法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를 세가지로 요약하여 이를 <세가지 법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가지 법인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말하는데,법인은 담마무드라(dha-mma-mudra)라는 범어를 번역한 말로,법본말(法本末).법본(法本).상(相).우단나(憂檀那)라고도 합니다.

 

법인이란 불교의 기치.표식(標識).특질.불교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불교를 증명하는 규준,즉 규법과 기준을 말합니다.인이란 도장이란 뜻이고,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곧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불교의 교설이라고 하여도 이 삼법인에 배치되는 사상은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것입니다.

 

또 법인이란 말은 진실하여 흔들림없고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뜻이며 마치 도장을 찍어서 이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틀림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삼법인은 이와같이 틀림없는 불교의 교의(敎義)를 크게 세가지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앞서 말한 제행무상.제법무아.열반적정의 세가지입니다.여기에다 일체행고(一切行苦)를 추가하여 4법인이라하기도 하고,이 네가지에 일체법공(一切法空)을 더하여 5법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3법인이든 4법인이든 5법인이든 이는 모두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기본적인 진리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은 가장 기본이 되는 3법인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는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입니다.

제행은 모든것을 의미합니다.모든것에는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행(行)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의 깊은 뜻이 있는데 범어 삼스카라(samskaka)를 번역한 말로 여기서의 행은 유위법(有爲法)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위법이란 인연따라 일어나고 인연따라 사라진다는 뜻으로 무위법과 반대되는 말입니다.무위법은 자연 그대로의 만고불변의 진리요,유위법은 인위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현상들입니다.

 

무상이란 항상 그대로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행무상은 모든것은 항상 그대로 있지 않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년년세세화상사이나,세세년년인부동(年年世世花相以 世世年年人不動)이라는 옛 시가 있습니다."해마다 꽃은 비슷하게 피어나지만 사람은 해마다 다르더라"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찌 사람만 해마다 다르다할 수 있겠습니까? 해마다 피는 꽃도 겉모습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꼭같은 꽃이 피어날는 수는 없습니다.이처럼 모든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이 변한다는 사실은 <항상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바로 이러한 현상은 비록 온갖것이 변해도 영원토록 변함없는 한결같은 현상,즉 진리입니다.이를 제행무상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하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하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유위법은 꿈같고 그림자같고 꼭두각시같으며 물거품같고 이슬같고 번개같으니 마땅히 이러한 것임을 관하라 하는 뜻입니다.

 

꿈이나 번개나 이슬과 같은 일시적인 것이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제아무리 단단하게 지은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라도 언젠가는 허물어질 뿐만 아니라 완공과 더불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찾아오는 백발은 어쩔수 없는일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세월을 무상살귀(無常殺鬼)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변해가는것은 물질적인 존재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사상이나 이념같은 것도 세월따라서 그 가치기준이 달라집니다.

 

옛날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어서 양반과 상민의 구별을 당연한것으로 생각했고 임금에 대한 충성을 최대의 미덕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사회주의 이념이 새로운 정치사조로 등장하여 사회주의가 빈부의 격차를 없애고 인간의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상인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나 요즘은 사회주의국가들도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또 옛날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하여 남녀가 한자리에 앉는것만으로도 큰 흉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이처럼 생각도 수시로 달라집니다.

 

오늘 먹은 마음이 내일까지 간다는 보장도 없고,우리의 생각은 잠시 잠깐도 고정적이지 않고 수시로 변하는것입니다.그러므로 물질만이 무상한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작용도 무상한 것입니다.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네가지의 모습으로 잠시도 그대로 머물러있지 않고,우리 생각도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이처럼 찰나간에도 변화하는 존재의 법칙이 바로 제법무상인입니다.

 

삼법인의 두번째는 제법무아인( 諸法無我印)입니다.

<제법>이란 모든 존재를 뜻합니다.앞서의 행처럼 법은 불질과 정신작용 모두를 말하는데 이 모든것들이 <나>라는 개성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 <나>라고하는 주체적인 개성이 없느냐하면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관관계에서만 존재하는 이른바 연기의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다시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이 무아는 범어로 안아뜨만,또는 니러아뜨만인데 이는 아뜨만이라는 단어에 이를 부정하는 안.또는 니르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아뜨만은 곧 아입니다.

 

다시말하면 <나>라는 뜻의 아뜨만을 부정하는 말이 <무아>입니다.

<아>는 영원히 변하지않고,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주인공으로서의 영혼 또는 실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그러므로 무아는 이런 <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날이저물어 어떤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밤이 이슥해지자 갑자기 밖이 소란하더니 한 아귀가 송장을 떠매고 들어왔습니다.그 뒤를 또 한 아귀가 따라 들어왔습니다.두 아귀는 송장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가 가져왔노라고 싸움을 벌였습니다.한참을 서로 싸우던 아귀들은 싸움을 멈추고 나그네에게 심판을 부탁했습니다.

 

나그네는 본대로 먼저 송장을 메고 온 아귀를 지적했습니다.그러자 나중에 온 아귀가 화가 나서 나그네의 팔을 쑥 뽑아버렸습니다.먼저 온 아귀는 자기를 변호해 준 나그네가 당하는 것을 보고 도와줄 셈으로 송장의 팔을 쑥 뽑아서 나그네의 뽑힌 팔대신에 붙여 주었습니다.더욱 화가 난 다른 아귀는 이제는 다른쪽 팔을 쑥 뽑아버렸고 그러자 또 한 아귀는 역시 송장의 팔을 뽑아서 붙여 주었습니다.

 

이런식으로 한 아귀는 나그네의 몸에서 팔다리는 뽑아내고 다른 아귀는 송장의 것을 붙여주다보니 마침내 나그네의 온 몸은 송장의 것과 바뀌게 되었습니다.그렇게 서로 싸우던 아귀들은 마침내 싸움을 그치고 송장을 먹어치우고는 가버렸습니다.

 

나그네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있는것인가? 없는 것인가?이미 부모가 낳아준 육신의 <나>는 아귀들이 다 먹어버리고 지금 <나>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죽은 송장의 몸둥이인데 나는 살아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죽었다고 할 것인가?

결국 나그네는 부처님앞에 아나가서 가르침을 받고서 <나>라는것이 없다는 진리를 깨치게 됐다고 하는 설화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나>라고 하는 것을 잘못알고 있습니다.이 몸을 나라고 알거나 끊임없이 변하는 자기의 마음을 나라고 알거나 이 두가지가 합한것을 나라고 아는데 몸과 생각은 앞서 말한것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무상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고 하는 <나>는 참다운 <나>가 아닌것입니다.만일 지금 현재의 내모습이 참으로 나의 모습이라면 1~2십년 전의 나의 모습은 누구일까요?만일 어렸을때의 나의 생각과 나의 모습이 진실한 <나>라면 지금 나의 생각이나 모습은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참된 <나>라고 하는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아란 내가 없다는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무아란 내가 없다는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나는 단지 인연따라서 어느 한시점에서 다른 시간으로 변해가는 <변화하는 과정의 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근본교의(根本敎義)인 <제법무아>는 <아>가 없다는것이 아니라 인도 고대의 사상인 실체로서의 아(我-아트만)의 존재를 부인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석존이 말씀하신 무아는 <아>가 될 수 없는 것,<아>가 있지 않는것,<아>라는 집착에서 떨어질 것,<아>가 아닌 것을 <아>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내것>이라는 관념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특히 우리의 신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경에 이르시기를,

"법은 <나>가 없고

또한 <내 것>도 없다.

<나>가 이미 없거니

<내 것>이 어디서 생기랴"하셨습니다.

--잡아함 권3 우타나경--

그러므로 이 무아사상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암적인 존재가 되는 탐욕의 근원인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세번째는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입니다.

열반적정이란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나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경지에 도달하는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단지 끊임없이 변화하고 (무상하고),나라고 집착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무아한),허무하기만한것이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이상적인 보람있는 면도 있는것입니다.

바로 깨달음의 세계요,부처님의 세계입니다.이를 열반적정인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열반이란 니르바나라는 범어를 소리대로 번역한 말로,한자뜻으로는 멸.적멸.멸도.적(滅.寂滅.滅度.寂)이 됩니다.해탈이라는 말과도 같은 뜻으로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리고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하는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니르나바>는 "불어끈다"는 뜻입니다.우리가 생사의 바다를 괴롭게 오가는것은 모두가 번뇌의 불길이 치성하기 때문인데 이 번뇌의 불을 꺼버리고 생사없는 절대편안한 경지에 이르는것이 열반임으로 열반은 곧 해탈이요 깨달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적정은 불교도라면 누구나 도달해야 하는 최고의 목표이기도 하고,무상하다 덧없다고만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지혜롭게 극복하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입니다.

 

불교의 이상은 하늘나라에 태어나는것도 아니고,극락세계에 태어나는것도 아닙니다.영원히 생사를 벗어나고 온갖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온갖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반야심경에서 말한 아무것에도 두려울것이 없고 아무것에도 걸릴것이 없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뜻대로 육도를 왕래하면서 중생제도의 큰 뜻을 펴는 것입니다.그러나 이런 경지가 단지 이상이나 희망사항일 뿐이라면,단지 상상속의 세계일 뿐 우리 인간으로서 이룩할 수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라면 불교는 한낮 속임수의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지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달하셨고 많은 선지식인들이 도달한 경지임으로 실제로 실현이 가능한 진실한것이므로 법인(法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법인이 무엇이지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하셨으리라 봅니다.이 삼법인에 대해서 소승의 사상이라고 무시하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그러나 법 자체에 소승과 대승은 없습니다.부처님의 가르침(=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소승과 대승이 있을뿐 진리자체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제행무상 이 세상 만물,다른것은 그만두고라도 나 자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어제의 선량한 사람이 오늘은 악인이 되기도 하고,어제는 악한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성스러운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이처럼 변하는것이 우리 인간입니다.바로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 <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비극적으로만 생각해 온 것 같습니다.무상은 <변한다>는 뜻인데,변하는 것은 발전한다는 뜻일수도 있습니다.변하지않고 그대로만 있다면 세상은 무슨맛으로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것은 변한다는 이 진리를 깨달아서 현재의 불행에 굴복하거나 좌절하지말고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노력해야 합니다.무상하므로 현재의 작은 행복에 탐익하지말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란 <나>라고 하는 것,<내 것>이라고 고집할것이 없다는것입니다.<나>라고 주장할 만한것이 없는데 어찌 내 것,내 자식,재 재산,내명예라고 집착하고 거기에 매달려서 한평생을 근심.걱정으로 보내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것이 변한다는 진리,<나>라는 것이 없다는 진리-이는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이것은 함이 있는 법(=유위법)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는 겉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영원불변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바로 깨달음의 세계,온갖 무상과 무아를 초월한 절대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바로 열반적정의 세계입니다.

 

불자여러분!

이 삼법인이라는 불교의 근본교의를 통해서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고,무상과 무아의 현실을 초월하여 생사가 없는 열반적정의 깨달음에 이르도록 우리 다같이 정진합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 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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