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가지 학문 >

 

"불도를 배우면 도과(道果)를 얻게 되는 바

이것은 계.정.혜의 힘이다"  -선견율-

 

우리가 불교를 믿는 목적은 도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더러는 "내가 무슨 수로 도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복을 지어 좀 더 잘살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분도 있을것 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도과의 증득 즉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처럼 성불하려고 하는것이 모든 불자들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누구나 도를 깨달을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을 것입니다.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누구나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수 있다고 하셨읍니다.

 

<법화경>에 보면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그대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그대들은 모두 다 성불하기 때문이니라"하셨습니다.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것이 분명하지만 아무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부처님의 위신력이나 대자대비의 원력만으로도 모든 중생들을 성불케하는것이 아니고,억겁의 세월이 지난다 해도 저절로 성불하는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성불할 수는 있지만 아무라도 성불하는것이 아니라는 말은 성불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지만 성불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억겁의 세월이 흐른다해도 저절로는 성불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누구나 노력하면 성불할 수 있느냐?

중생각자가 모두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중생들 스스로 자기자신의 성품가운데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성은 마치 퇴비더미 속에 묻혀 있는 보석과 같다고 했습니다.자기 집 퇴비 속에 묻혀 있다면 언제라도 그 보석은 집주인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퇴비속에 묻혀있는 한은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보석으로서의 제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퇴비더미를 헤치고 보석을 찾아내 그 겉에 묻은 때를 말끔히 씻어내야만 찬란한 빛을 내는 값진 보석의 구실을 할 수 있는것입니다.퇴비를 걷어내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보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의 성품 가운데 들어있는 불성이라도 이를 믿지 않거나 믿더라도 개발하는 노력이 없으면 성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진리를 깨닫는 것은 본인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시켜서 되는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기도 하고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뗏목에 매달리는 사람,손가락만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하물며 뗏목도 손가락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야 더말할나위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반드시 성불하겠다는 결심을 한다고 해서 다 성불하는 것도 아닙니다.확신과 결심을 했으면 그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배워야하는 것입니다.이처럼 깨달음을 얻으려고하는 사람은 마땅히 배워야하는 일을 크게 셋으로 나눈것이 삼학입니다.

 

예기(禮記)에 "옥불탁(玉不琢)이면 불성기(不成器)하고,인불학(人不學)이면 부지의(不知義)니라" <옥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의(義)를 알지 못한다>했습니다.

 

아무리 밝은,구슬같은 보옥이라도 갈고 다듬지 않으면 찬란한 빛을 낼수 없는것처럼 사람도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인간생활의 바른 길을 알지 못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중생들도 누구나 불성이라고하는 보배를 간직하고 있음으로 근본에 있어서는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바 없지만 삼학을 닦지 않으면 완전한 부처가될 수 없어 중생으로 머물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삼학은 어떤 공부를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 계학(戒學)은 좋은 습관을 익히는 공부입니다.계(戒)는 한자로는 '경계한다'는 말입니다.범어로는 시라인데,행위.습관.성격 등의 뜻을 가졌습니다.그러므로 삼학 가운데 계학은 바른행위.바른습관.바른성격 등을 배운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익히는 것을 선계(善計)라 하고 나쁜 습관을 익히는 것을 악계(惡計)라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계라고 하면 깨끗하고 선한 습관.곧 선계만을 말하게 됩니다.

 

계는 우리 불자들의 올바른 생활규범입니다.

습관을 길들이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번 잘못된 슴관을 익히면 차츰 그 길로 빠져 들기 마련입니다.요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마약문제도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자기자신과 가정,나아가서는 사회전체를 불행하게 하는 경우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편한것을 좋아하고,쾌락을 좋아합니다.육체가 하자는대로 하다가는 마치 알콜중독자나 마약중독자와 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품가운데 간직된 불성은 회복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계는 곧 몸둥이가 하자고하는 대로 끌려가지 않고 올바른 정신으로 바른 생활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창(六窓)의 비유입니다.

옛날에 어떤 장자 한사람이 빈 집 가운데 새.뱀.개.악어.여우.원숭이를 한 우리속에 가두어 넣고 길을 들여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새는 공중으로 날아가려하고 뱀은 땅구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개는 마을알 찾아가려고하고,악어는 바다로 들어가려고,여우는 무덤있는 곳으로.원숭이는 산 있는 곳으로 향하여 도망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장자는 이놈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고 한 놈을 잡아다가 제자리에 갔다 놓으면 다른 녀석이 달아나고 그 놈을 잡아 놓으면 또 다른 놈이 달아나므로 기진맥진했습니다.생각끝에 마당 가운데 큰 기둥을 세워놓고 그 여섯마리의 동물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매일매일 적당한 음식을 주어 길들이기 시작했습니다.처음에는 잘먹지도 않고 날뛰기만 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차츰 주인의 말을 잘 듣다가 마침내는 주인에게 복종하게끔 길들여졌다고 합니다.

 

이 비유 가운데 빈집은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고 여섯짐승은 우리몸에 붙어있는 여섯기관의 기관 즉 눈.귀.코.혀.몸.뜻의 육근(六根)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우리 중생들도 이와같다고 하셨습니다.눈은 항상 새처럼 높은 것을 좋아하고,귀는 뱀처럼 여러가지 소리를 들으며,코는 개와 같아서 구수한 냄세를 좋아하고,혀는 악어처럼 맛있는 음식을 탐하며,몸은 여우처럼 부드러운 살결을 탐내고,뜻은 원숭이가 산중에서 마음대로 뛰놀듯 항상 방탕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원하듯이 우리 중생들도 육체의 육근에 끄달려서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은 마치 장자가 여섯마리의 짐승을 길들이듯 육근이란 감각기관을 한곳에 단단히 묶어놓고 길들일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부처님이 육근을 붙들어 매라하신 "한 곳"은 다름아닌 계법(戒法)입니다.

 

계에는 오계.십계로 부터 비구 이백오십계.비구니 오백계 등 많은 조항이 있습니다.그러나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릇된 곳에서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형식적인 계목이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습관을 갖도록 노력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오계는 첫째 살생하지 말라,둘째 도둑질하지 말라,셋째 사음하지 말라,넷째 망어하지 말라,다섯째 술마시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때,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누구를 스승삼아서 공부하오리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계를 스승삼아 공부하라"하셨습니다.남에게 해로움을 주면서 성불을 바라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불교인은 누구나 계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육조스님은 " 심지무비백성계(心地無非白性戒)"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마음에 그릇됨이 없는것이 참다운 계"라는 뜻입니다.

 

설사 겉으로 나타난 행동은 선해보일지라도 속마음이 딴데 있으면 계를 지켰다고 할 수 없고,이와 반대로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그릇것 같아도 선한 마음으로 하는 일이면 파계라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그러므로 참다운 계는 "삼계'즉 "마음의 계"요, 형식적인ㄷ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정학(定學)입니다.

정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범어로는 삼마디인데 삼매라고도 합니다.팔정도의 하나인 정정(正定)과 같은 것인데 선정이란 말과도 동일한 뜻으로 쓰입니다.

 

정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게하는 일종의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왜 이런 정신상태가 성불에 필수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리요"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면 못하는 일이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일이든 성공을 하려면 정신을 통일해야 하는ㄷ제 하물며 생사대사를 해결하고 삼계윤회를 벗어나 부처가 되려고 하는데 있어서 정신을 통일하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한다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들도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불성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에 번뇌.망상이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열반경에 " 일체중생은 다 불성을 갖고 있다.단지 번뇌에 덮혀 있음으로 인해 볼 수가  없구나" 하였습니다.

이 번뇌만 제거하면 우리는 불성을 볼 수 있을터인데 번뇌때문에 불성을 보지 못하고 불성을 보지 못해서 중생으로 머물러 생사윤회를 거듭하고 항상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번뇌는 다른것이 아니라 잡된 생각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시도 쉴새없이 마음이 어지로운것이 곧 번뇌요,망상입니다.우리는 단 한시도 고요한 마음.평온한 마음.오직 일념을 가져보지 못하고 온갖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밤에도 꿈을 꾸면서 온갖 생각들을 합니다.이처럼 번뇌심을 가지고 살면서 이 번뇌심이 자기의 참마음인 줄 착각하고 자기의 진실한 본마음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번뇌는 다른곳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육근,즉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입니다.본래 번뇌라는 것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맛보고 감촉하고 헤아리는데 따라서 생겨나는 것 입니다.눈에 어떤 물건이 보이면 그것을 갖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고 가질수 없다 싶으면 속이 상하지 않습니까?

 

아무 근심.걱정없이 그동안 수돗물을 식수로 사용하던 분들이라도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수돗물의 오염도 실태를 안 후로는 새로운 ㄴ근심과 걱정이 생겼으리라 봅니다.

 

이처럼 번뇌라는 것은 그 뿌리가 자기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것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것으로 우리몸의 여섯창문을 통해서 들어온다고 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창문만 닫아버리면 아무런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정(定)은 이처럼 창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해서,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않으려고 한다고 해서 번뇌.망상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생각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으면 마음 먹은데로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어디 그렇게 됩니까?

 

그래서 방편으로 무언가 하나만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입니다.마치 낚시꾼이 고기잡을 생각만 하다가보면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고,바둑두는 사람이 바둑에 열중하다보면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가지만을 생각함으로써 다른 잡념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함으로서 자기의 본마음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참선은 선정을 위해서 가장 좋은 수행방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참선만 해야 정학을 닦는것은 아닙니다.염불을 열심히 하여 염불삼매에 들어서 정을 닦을 수도 있습니다.

 

방법은 여러가지 있겠으나 목표는 하나입니다.산란한 마음을 한곳에 모음으로써,마음을 번뇌로부터 해방시켜 본래부터 간직하고 있는 불성을 찾아내려는 수행이 바로 정학입니다.우리의 불성을 덮고 있는 번뇌를 제거하기만 하면 부처님과 다름없는 불성이 드러나서 바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혜학(慧學)은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입니다.

"여래의 지혜는 없는데가 없다.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일체중생들이 이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망상.뒤바뀐 생각.집착때문이다.만일 망상을 여의면 일체지.자연지.무애지가 곧 앞에 나타나게 된다."

 

<화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어리석은 범부노릇을 하고 있습니다.왜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가 있으면서도 괴로운 삶을 사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지혜가 있되 이 지혜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혜를 활용하지 못하느냐?

부처님께서는 그 까닭을 우리가 <망상.뒤바뀐 생각.집착>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이 망상.뒤바뀐 생각.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바로 부처님과 다름없는 한량없는 지혜가 드러난다고도 하셨습니다.계를 지키고,정을 닦고 하는것도 다름아닌 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개발하여 유익하게 활용하자는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지혜>는 곧 불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망상은 무엇입니까?

쓸데없는 생각입니다.허황한 생각입니다.분수를 모르는 생각입니다.교사는 교사로써 임무를 충실히 하면 되는데 국회의원을 꿈꾸는 것은 망상입니다.가정주부가 일류 탈렌트를 부러워하고 이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도 망상입니다.

 

<뒤바뀐 생각>은 검은 것을 희다고 생각하고 흰 것을 검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의 전도현상입니다.돈이란 것은 잘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데 돈버는 일이 인생의 목적인양 착각하는 것은 뒤바뀐 생각입니다.대학에 진학하는 목적이 학문수양을 쌓아서 지성인이 되자는 데 있지 않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배우기 위해서라면 이것도 뒤바뀐 생각입니다.

 

집착은 모든 것이 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제행무상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의 마음에 들면 죽어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집착입니다.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분수를 알고,사물의 가치를 바로 보고,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이런 수행을 쌓아가는 것이 바로 혜학입니다.

 

여러분,

이 계정혜 삼학은 불교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철학입니다.불교는 이 세가지를 떠나서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팔정도.육바라밀도 이 삼학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와 정과 혜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것은 아닙니다.

계는 지혜가 없으면 지킬수 없고,계를 지키지 않고 정을 닦을 수 없으며 정을 떠나서 산란한 마음으로는 지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정.혜 삼학은 하나이면서도 셋이요,셋이면서 하나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우리자신 가운데 간직된 불성은 이 셋이 완전히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을 밝혀 불성을 개발하면 이 세가지의 덕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그래서 부처님게서는 우리 모든 중생들도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하신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세가지의 학문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서 항상 실천함으로써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지혜로운 삶을 살고,나아가서는 마침내 성불에 이르도럭 힘씁시다.

성불하십시요!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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