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스님 법어> 삼귀의와 사홍서원

 

오늘 법회에서는 불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입교서약인 삼귀의와 모든 불자들의 공통적인 서원인 사홍서원에 대해 말씀드리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어느 종교건 간에 하나의 신앙형태가 종교로 인정을 받으려면 세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셋이란 교주와 교리와 교단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법승 삼보라고 하는데,불은 교주요,법은 교리요,승은 교단을 의미하는 말로 이 세가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와 같기 때문에 불법승삼보(佛法僧三寶)라고 하는 것이,삼귀의는 이 세가지의 가장 값진 대상에 귀의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귀의불,귀의법,귀의승을 말합니다.

<귀의불>이란 불교의 교주인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이요,

<귀의법>은 불교의 교리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뜻이요,

<귀의승>은 불교의 교단인 승가에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삼귀의는 불자가 되는 서약입니다.또한 삼귀의란 불자의 가장 기본적인 입교의식입니다.따라서 진실로 삼귀의를 한 사람은 비록 처자권속을 거느리고 시장에서 생선장수를 한다고 해도 불자이지만,진정으로 삼귀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출가를 한 스님이라할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의’라고 하는 말은 범어인 나마스를 번역한 말입니다.보통 우리가 나무아미타불.나무관세음보살.나무대세지보살-이렇게 ‘나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바로 이 나무라는 말이 인도말인 ‘나마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나마스’ 또는 ‘나모’- 이것을 소리로 번역한 것이 나무요,뜻으로 번역한 것이 <귀의>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를 <귀의>라고 하는 한문으로 번역한데는 첫째는 ‘돌아간다’고 하는 뜻이있습니다.그러면 어디로 돌아가느냐? 귀의불.귀의법.귀의승이니까,불법승 삼보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의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어디에 의지하느냐?역시 첫째는 불이요,둘째는 법이요,셋째는 승으로 이 세가지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하면 <귀의>라고 하는 말에는 돌아간다는 뜻과 의지한다고 하는 뜻이 있는데,어디로 돌아가고 어디에 의지하느냐? 돌아가고 의지하는 대상이 무엇이냐 하면 불.법.승 삼보를 말함입니다.

 

또 이 <귀>자에는 ‘생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비로 목숨의 근원,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뜻이 ‘돌아간다’고 하는 <귀>자 가운데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의 근원>은 곧 마음입니다. <생의 근원>이 왜 마음이며,이 마음이 곧 불법승 삼보다 하는 것은 다른 교리시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그치겠습니다.

 

다음에 의지한다고 하는데는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의지하는데는 믿음이 필수적입니다.장님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길을 건너가고 전철도 탑니다.만일 장님이 지팡이를 믿지 못하면 감히 길을 나설수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의지할 마음이 나지를 않습니다.그러므로 의지한다고 하는데는 먼저 강한 믿음의 뿌리가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의> 가운데는 믿을 신<信>자 신이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신위도원공덕모(신위도원공독모)라 했습니다.믿음은 도의 원천이요,공덕의 어머니라고 하는 경구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귀의라는 말을 다시 정리해보면, 귀의는 첫째 돌아간다.둘째 의지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또 돌아간다고 하는데에는 근원 즉 본래자리 다시말하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있고,의지하는데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 <귀의>인데,그러면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고 스스로 의지하는 대상은 무엇이냐? 바로 불.법.승 삼보로 이와같은 믿음이 삼귀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귀의>는 단지 막연하게 신앙대상으로 예경한다고 하는 뜻만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불법승 삼보를 믿고 의지한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다음은 삼보인 불법승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의 교주는 석가모니 부처님인데,석가란 말은 종족의 이름입니다.우리 민족은 한민족이듯이 석가란 ‘샤카’라고 하는 종족의 이름인데,석가모니 부처님이 샤카족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모니’란 선생님,스승,성자란 뜻입니다.그러므로 ‘석가모니’란 석가족의 스승 또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지요.석가모니 부처님은 불교의 교주이시므로 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이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하는 <귀의불>입니다.

 

붓다,또는 부처란 어떤 특정한 분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깨달음을 이룬 사람>을 칭하는 보통명사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라고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깨닫는다고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무엇을 깨달아야 부처라고 하는가? 이 질문은 매우 추상적인 질문이 되겠습니다마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무엇을 깨달으셨느냐? 하는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엇이냐- 한자로는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이는 온갖 사물의 이치와 현상을 완전하게 터득한 지혜를 일컫는 말입니다.여기에는 인생의 삶과 죽음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실상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생명의 본질에 대한 자각입니다.근원이 무엇이냐? 바로 이것을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하는데 불성을 깨달음으로써 우주만유의 근본을 자각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처의 근본이기도 하고 모든 생명체의 근본이기도 한 불성-이것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불성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불성이 있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여기 나와서 삼귀의 사홍서원이 무엇인지 설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단지 석가모니 부처님께만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 가운데의 자성불(自性佛)에 귀의하는 것입니다.이제 앞에서 하는 말이 왜 <귀의>라고 하는 말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했는지 이해되시리라고 믿습니다.

 

다음, 법이란 무엇이냐?

좁은 의미로는 종교의 삼요소의 하나인 불교 교리를 법이라고 합니다.팔만대장경으로 지칭되는 부처님의 일대교설이 법입니다.여기에는 경장과 율장과 논장이 포함되는데 경장이란 부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진리에 관한 내용이고,율장은 주로 계율에 관한 말씀,논장은 후세의 불교학자들이 저술한 여러 논서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귀의법>하는 법은 단지 이와같은 유형의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만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앞서,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으신 것이 바로 생몀의 근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그런데 이 생명의 근원인 불성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다시 말하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어떤 존재의 법칙.어떤 운동의 법칙에 의해서 생성소멸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법(法)입니다.

 

이것은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대로 존재하는 우주만유의 법칙입니다.바로 이 법칙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입니다.깨달으시고 그 내용을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설명하신 것이 부처님의 법문이요,이를 후세에 기록한 것이 경전입니다.그러므로 이 법은 부처님께서 깨닫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존재하는 것이고,부처님께서 깨달으셔셔 말씀하셨다고 해서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닙니다.만고불변의 진리 자체를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귀의승>인데, 승이란 ‘상카’라는 인도알에서 유래된 것으로 종교의 삼요소 가운데 하나인 교단입니다.국민은 나라에 귀속하고 회사원은 회사에 귀속하고 가족은 가정에 귀속해 그 안에서 질서를 지키고 의무를 다해야만 나라와 회사와 가정이 원만하게 유지발전하듯이 불자는 승가라고 하는 교단에 절대 귀의해야만 참다운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된 삼귀의계에 보면,‘귀의승’을 ‘거룩한 스님에게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이라고 봅니다.왜냐하면 승가란 단지 스님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출가한 남녀승려와 재가의 남녀신도-이를 사부대중이라고 하는데 ‘승가’는 이 사부대중을 말하는 것이지 스님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특히 승가는 신도위에 군림하는 집단이 아니라 신도가 참여하여 화합하는 대중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승가를 한문으로 화합중(和合衆)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화합을 이루고 사는 단체-이것이 바로 승가입니다.따라서 승가는 단지 스님들,또는 교단이라는 편협한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구성원,다시말하면 모든 중생들을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대승불교의 이념에 합당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불자의 귀의 대상인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우리가 돌아가 의지하는 부처님이란 불교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진리를 깨달으신 모든 부처님,그리고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불성자체를 말하는 것이요,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요,구체적으로 경율론 삼장이요,광의로는 일체의 진리를 말한다.그리고 승이란 사부대중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가르킨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삼귀의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그치고 다음으로는 사홍서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홍서원(四弘誓願)이란 네가지의 큰 서원이라는 뜻인데 곧 중생을 제도하고,번뇌를 끊고,법문을 배우고,불도를 이루겠다고 하는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渡),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을 말합니다.

 

그러면 서원이란 무엇인가? 서원은 소원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가졌지만 소원이 자기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면 서원은 자리아타를 겸한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하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범어로는 ‘사트바’라고 하는데 유정(有情),또는 함식(含識)이라고도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심식(心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심식이란 마음 또는 생각이라고 하면 알기 쉬울것입니다.대체로 이 말은 “생존하는 것”이란 뜻이고,일체의 생명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중생부류를 크게 육도로 나눕니다.천상.인간.지옥.아귀.축생.아수라의 여석 갈래 유정들을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이 밖에 태어나는 형태에 따라서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태생은 사람이나 짐승처럼 태어나는 중생을 말하고 난생은 새나 곤충처럼 알로 태어나는 생명,습생은 습기로 태어나는 중생,그리고 화생은 화하여 태어나는 중생을 말하는데,이는 의탁한 데가 없이 홀연히 생겨나는 출생의 형태로 모든 천상과 지옥 중생은 화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또 중생이 과거에 지은 선.악의 행위에 따라 아홉가지의 차별에 따라서 앞서 말한 태란습화의 사생에다가 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을 더하여 구류중생이라고도 합니다.유색(有色)과 무색(無色)은 형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구별이고 유상.무상(有想.無想)은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별이며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은 생각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중생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한량없는 많은 중생이 살고 있기 때문에 중생이 가이 없지먄 기필코 이들을 다 제도해서 성불토록 하겠다고 하는 서원이 <중생무변서원도>로 “가이없는 중생 모두 다 건지리다”하는 서원입니다.

 

이 서원은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고 하는 현대인들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다같이 잘살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서원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오직 자기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구원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모든면에 있어서 흑백논리가 성립되어 투쟁일변도의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 중생무변서원도의 서원은 불교도 뿐만이 아니고,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을 다 제도하겠다고 하는 서원이므로 다른 종교의 구원의 원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나 회교도가 종교전쟁을 일삼은데 반하여 불교는 단한번도 종교의 전파를 목적으로 한 전쟁을 일으킨 일이 없습니다.비록 이교도의 칼날아래 무참한 살육을 당한적이 있지만 부처님의 깃발을 앞세우고 남의 나라를 침략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비록 이교도라도 모두 제도해야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불국정토를 건설해야 할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겠다는 서원은 먼저 자기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차별심을 없애야만 가능한 일입니다.바로 이것이 사홍서원 가운데 후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성중생서원도(自省衆生誓願度)입니다.

 

자기 성품 가운데 있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이 서원은 불자는 먼저 스스로 온갖 차별심을 타파하고 평등심을 가져야만 죄인이건 미물이건 다같이 고귀한 생명체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한량없는 중생이 다 살고 있습니다.천상 사람.인간.지옥.아귀.축생.아수라 등의 육도 중생이 우리 성품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이것이 바로 차별심을 일으키므로 이 차별심을 없애는 것이 곧 <자성중생서원도>요,이런 마음가짐이라야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보면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모든 사람을 만날때마다 “나는 그대를 가벼이 보지 않습니다.왜냐하면 그대는 반드시 성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상불경 즉 ‘항상 가벼이 보지 않는다’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이러한 마음이라야 바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은 번뇌가 한량없지만 이를 다 끊겠다는 서원인데 번뇌란 무엇입니까?

 

번뇌는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게 하는 모든 정신작용을 총칭하여 하는 말입니다.우리 중생은 이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그 결과로 괴로운 과보를 받아서 삼계육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번뇌는 곧 지혜의 반대가 되는 말인데 불교수행의 목적은 번뇌를 끊고 지혜를 회복하여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번뇌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몇시간은 족히 걸릴것이므로 이 정도로 해두고 그러면 왜 번뇌를 끊어야먄 하는가 하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근본자성,다시 말하면 불성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무엇에도 자유롭고 세상의 모든 이치를 낱낱이 알 수 있는 지혜와 온갖 공덕을 다 구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로 불성이 불성으로서의 제구실을 못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번뇌가 불성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불성을 맑은 거울이라 하면 번뇌는 먼지와 같은 것입니다.그러므로 불성을 회복하여 성불하자면 무엇보다도 거울에 낀 먼지와 같은 이 번뇌를 닦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도 그 근본은 모두 우리 자신의 성품,곧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아무리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한다고해도 마음속에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잠재해 있지 않다고 하면 번뇌도 일어나지를 않습니다.우리 마음속에 번뇌의 씨앗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맛보는 대상이 그대로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성번뇌(自性煩惱),곧 자기 성품 가운데서 잠재하고 있는 번뇌의 뿌리를 끊어야만 진정한 번뇌무진서원단이 달성될 수 있으므로 자성번뇌서원단의 서원도 함께 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음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은 부처님의 법문 즉 가르침이 한량없지만 이를 기어코 다 배우겠다고 하는 서원입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이 왜 한량없이 많은가 하면 깨달으신 내용은 한결같지만 중생들의 근기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한량없이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배우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만 해탈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부처님처럼 중생제도를 하기 위해서는 한량없는 방편을 다 배우겠다고 하는 서원입니다.

그런데 이 법문무량서원학의 서원도 자성법문서원학의 서원이 함께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곧 중생들의 성품 가운데 간직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비록 우리가 번뇌 망상에 쌓여서 중생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이 중생심을 떠나서 따로 부처님 마음이 없습니다.

 

중생심 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법문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놓고 아! 잘못했구나-이런 반성을 하는 것은 내 마음 가운데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똑같은 법문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양심을 회복하라고 한다든지,양심선언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모두 자성법문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나의 양심 가운데 다 들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서 양심을 회복하는 일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다 배우겠다는 법문무량서원학의 서원을 실천하는 길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끝으로 <불도무상서원성>이 되겠는데 불도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길입니다.부처님이 깨달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것이 곧 불도를 성취하는 것이고 우리 불자들이 항요 쓰는 <성불합시다>하는 말이 곧 ‘불도무상서원성’입니다.

 

<불도를 꼭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사홍서원 가운데 번뇌무진서원단.법문무량서원학의 서원을 다 포함한 서원이라고도 할 수있습니다.왜냐하면 성불을 한다는 것은 곧 번뇌를 단절해야만 가능한 것이고,성불하게 되면 한량없는 법문이지만 이를 일시에 통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삼귀의와 사홍서원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이를 다시 요약해서 말씀드리고 오늘 설법을 마치겠습니다.

 

삼귀의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고 하는 말입니다.이는 교주이신 부처님과 교리인 법문과 교단인 승가에 귀의한다는 서약입니다.

 

귀의라고 하는 말은 인도말로는 ‘나마스’인데 ‘돌아가 의지한다’고 하는 뜻입니다.‘돌아가 의지한다’고 하는데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믿음이라는 것이 전제 되는 것으로 불법승 삼보는 교주와 교리와 교단을 의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므로 이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삼귀의는 곧 불자로서의 서약이므로 누구나 진실로 삼귀의를 실천하여야만 명실상부한 불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홍서원은 자리이타를 실천하는 대승보살의 총원(總願)으로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겠다는 불자의 위대한 서원입니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은 이웃과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서 일체의 차별심을 떠나 모든 중생들이 다 성불 할 때까지 모든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서원이며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고 불도를 이루겠다고 하는 서원은 상구보리(上求菩理)의 서원입니다.

 

요즘 우리 불교계는 보약장사는 많아도 스스로 보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한 보약이라고 할지라도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불자들은 일류 약장수가 되어 약을 많이 파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 스스로 먼저 약을 복용하는 환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마칩니다.

 

<성불하십시오>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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