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불교조계종 종정

*불광사 주지(경남 양산시 소재)

*SBC 서울불교방송, 불교일보 사장

*세계불교승왕 청봉 석정산 예하

*전 사단법인 대한불교종단총연합회 회장

 

 

인연과 인과(因果)



 

 

諸法從緣生(제법종연생)

諸法從緣滅(제법종연멸)

我佛大沙門(아불대사문)

常作如是說(상작여시설)

 

 

오늘은 인연과 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앞에 든 게송을 우리말로 해석하면, “모든 법은 인연으로 쫓아나고 인연 따라 없어진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부처님의 십대제자들 가운데 지혜 제일인 사리불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 인연이 되기도 했던 말씀입니다. 오늘의 주제가 인연과 인과에 대한 것이므로 이 경구정과 관련된 인연설화를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사리불은 마갈타국 왕사성의 북쪽 나라촌(那羅村)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릴적 이름은 우바저사라고 했습니다. 여덟 형제 중에서 가장 총명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웃 마을의 바라문족 가운데 용모가 준수하고 글공부에도 뛰어난 구리다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이 분이 바로 목련존자입니다.

이 두 소년은 어느날 왕사성 근방의 산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함께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축제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며 온갖 기예를 자랑하는 한바탕의 즐거운 놀이마당이었습니다. 마갈타국에서는 이런 축제가 계절마다 열리게 되어 있었는데, 신에게 올리는 제사의 성격도 띄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축제에 참가한 우바저사와 구리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이 축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저 먹고 마시며 웃고 노는 것으로 만족했겠지만 성인이 될 사람은 무언가 다른 점이 있는가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괴로움 가운데서도, 더럽고 탁한 가운데서도, 쇠하고 늙는 가운데서도 즐거움을 찾아 함부로 살아가는구나. 백년이 지나고 보면 이 대중들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우바저사는 말없이 축제마당을 떠나 한가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가 나무 밑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한편 역시 그 축제를 관람하던 구리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극 광대의 어릿광대를 보고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중들이 백년이 지나도 저 웃는 턱과 광대뼈를 다시 놀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우바저사를 찾았지만 이미 우바저사는 그곳에 없었던 것입니다. 구리다는 우바저사를 찾아 한동안 숲속을 헤메다가 한 나무 및ㅌ에 조용히 앉아 사색에 잠겨있는 우바저사를 발견했습니다.

둘은 서로 만나 인생에 대해서 논하다가 마침내 함께 출가하여 수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우바저사의 부모님은 아들의 출가를 극력 반대했습니다. 두 번 세 번 청해도 부모님들이 허락하지 않자 우바저사는 7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마침대 출가 허락을 받은 우바저사는 구리다와 함께 출가하게 되었는데, 이 때의 출가는 부처님의 교단에 출가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유명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던 ‘산사야’라는 외도의 교단에 출가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본래 총명하고 학식이 높았기 때문에 산사야 처소에서 일주일만에 스승과 같은 높은 경지에 올라 곧바로 오백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산사야의 가르침은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는 최상의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두 사람은 만약 또다시 이보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서로 알게 하자”고 서로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우바저사는 왕사성에서 한 비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부처님의 제자인 아수바유기다(일명 馬星, 馬勝)였습니다. 우바저사는 첫눈에 이 분이 비범한 인물임을 간파했습니다. 걸음걸이라든지 얼굴색 등을 통해서 아주 훌륭한 수행자임을 간파한 것입니다.

우바저사는 “세상에 모든 아라한이며 일페 성인과 도를 성취한 분이 있다고 하면 지금 이 대덕이야말로 그 하나에 손꼽히리니 나는 응당 저번에게 나아가 의심됨을 물으리라”이렇게 생각하고 걸식이 끝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걸식하는 동안에 질문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에 걸식이 끝나 처소로 돌아가자 그 뒤를 따라가 인사드리고 공손히 물었습니다.
“인자여, 당신은 바로 스승이십니다? 아니면 다른 이의 제자입니까?”
이 질문을 받은 아수바유기다는 ‘따로 큰 스승이 계시고 나는 그의 성문제자인데 스승은 일체법을 깨달으신 부처님, 세존’이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 스승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시느냐고 우바저사는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수바유기다는 말하기를,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모든 법은 인연으로 쫓아 나고 인연 따라 없어진다. 우리 스승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게송입니다. 경전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동일합니다.

이 게송을 듣고 우바저사는 구리다와 함께 산사야의 교단을 떠나 부처님께 귀의하였는데, 이 분들이 바로 뒷날 불교교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 사리불과 목건력 존자입니다. 사리불은 지혜제일의 제자가 되었고 목련존자는 신통제일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 두 분을 따라서 산사야의 500제자들도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산사야는 화병이 나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도 합니다.


이 설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불교사상과 다른 이단사상과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바로 연기사상(=인연법)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육사외도(六邪外道)라고 해서 불교 이외에도 여섯 가지의 큰 사상가들이 있었는데 그들 사상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확실하게 구분지을 수 있는 특징이 바로 이 연기사상입니다.

그래서 산사야의 제자였던 우바저사(사리불존자)가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물었을 때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아수바유기다는 서슴없이 “모든 법은 인연으로 좇아 나고, 인연 따라 없어진다. 우리의 부처님은 항상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법’이란 물질과 정신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인도사회에는 네 가지의 계급제도가 있는데 가장 상위계급인 승려계급을 브라만이라 하고, 그 다음 왕족이나 귀족계급을 크샤트리아, 평민계급을 바이샤라고 하는데 이 제도는 지금도 인도 사회에 악습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네 계급 외에도 더 하층에 ‘하리잔’이라고 하는 불가촉천민계급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계급제도가 태어나는 순간 이미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에 의해 신분이 정해지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이미 확정되어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곳 신, 브라만의 뜻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거역할 수 없고 거역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인연설(=연기설)은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구조 문제에 있어서도 가히 혁신적인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인연(因緣)이란 인(因)과 연(緣)을 말합니다. <인>은 중심이 되는 원인이고 <연>은 그 조연(助緣)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인과 연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인>은 어떤 사물의 현상의 중심적인 원인을 말하고 <연>은 그를 돕는 부수적인 조건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가령 여기 두 사람의 청춘남녀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결혼적령이가 되어 맞선을 본다고 할 때, 두 청춘남녀는 <인>이 되고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는 매파는 <연>이 됩니다. 그러나 중매쟁이 없이 두 남녀가 연애를 해서 결혼가게 되는 경우는 두 사람이 각기 <인>도 서로 처음 만나게 된 동기, 즉 주변 환경이라든지 분위기 따위가 연이 되는 것입니다.

씨앗과 싹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씨앗이 인이 되고 물과 공기, 햇빛은 연이 됩니다. 그러나 수증기의 경우는 물이 인이 되고 햇볕이 연이 됩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스스로 인도 되고 연도 되는 것입니다. 마치 그물에 있어서 그물코처럼 서로서로 인과 연의 관계로 얽혀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상의상자(相依相資)라고 하는데 화엄경에서는 제망중중(帝網重重)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모든 존재들이 인연에 쫓아 생하고 멸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법칙이 있을 것이 아닌가? 아무런 질서도 없이 인연이 모이고 흩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범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보면 봄 다음에는 여름이 오고, 여름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겨울이 옵니다. 절대로 봄 다음에 겨울이 오거나 여름이 지나서 다시 봄이 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어린이가 자라면 청소년기를 거쳐서 어른이 되고, 성인이 되면 늙고 병들어 죽어갑니다. 결코 간난아이가 갑자기 어른이 되거나 어른이 다시 어린이로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고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거기에 바나나가 열리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보면 거기에는 무언가 절대불변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절대불변의 법칙이 바로 인과의 법칙입니다.

<보살영락본업경>에 보면 인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위 인과란 무엇인가? 우리가 짓는 선악을 인(因)이라 부르고, 그 때문에 받는 고락(苦樂)을 과(果)라고 부르며, 과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인(因)이라 하고, 인을 근거로 하여 생기(生起)되는 것을 과(果)라 한다. 이같이 근거와 생기가 서로 의존해 있는 것을 한 데 묶어 인과라 한다.”

즉 인과는 원인과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결과는 원인을 전제로 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과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생하고 인연에 의해서 사라지지만 거기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이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는 어떤 창조주나 조물자와 같은 주재신(主宰神)이 없어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유지발전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상상해봅시다.
어린아이가 갑자기 늙은이로 변해버리고, 노인네가 다시 어린아이로 변하는 일이 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언젠가 잡지에서 어느 카톨릭 신부의 글을 읽은 일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자기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숲을 보면서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숲에는 온갖 크고 작은 식물이 자라고 있고, 온갖 새와 산짐승, 풀벌레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때, 만일 이를 주관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갖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와 같은 평화스러운 숲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마누라가 고우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을한다.’는 속담처럼 신에 반하고 온갖 것이 다 신의 섭리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보면 신이 있어서 온갖 식물과 곤충, 동물들을 보살핀다고 보는 것이 이성적일까요? 아니면 그것들이 인연 좇아서 그와 같이 질서 있게 모여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좇아서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인과의 법칙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입니다.

이를 우리 생활상의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바꿔 표현하면 선인악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가 됩니다. 선한원인을 지으면 즐거운 과보를 받고 악한 원일을 지으면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더러는 일체 법이 인연소생이라면 이 몸도 인연소생이므로 오직 인(因)과 연(緣)의 이합집산이 있을 뿐이므로 자성(自性)이 공(空)한데 어디에 인과가 있겠는가? 하고 인과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얼치기 도인들이 이런 주장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화엄경의 문수보살과 보수보살의 대화를 통해서 정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문수보상이 보수보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사대(四大)로 똑같이 이루어져 있어서 다 같이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는 터인데, 어찌하면 어떤 사람은 괴로움을 받고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받으며, 어떤 사람은 단정하고, 어떤 사람은 추악하며 어떤 사람은 현세에서 과보를 받고, 어떤 사람은 후세에 가서야 과보를 받게 됩니까?”

보수보살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행위를 따라 이런 과보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맑은 거울이 그 대하는 사물의 모양을 따라 비추는 모습이 각기 다른 것과 같습니다. 업(業)의 본성도 이러해서 밭에 뿌려진 씨가 각기 자각하지 못하지만 저절로 싹이 트는 것과 같으며, 환술사(幻術師)가 네거리에서 여러 몸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의지하는 종교입니다. 부초님은 창조주가 아니라 연기의 도리•인과의 도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는 마땅히 인과를 믿고 인과를 두려워할 줄 아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리불존자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생하고 멸한다는 말을 듣고 외도를 버리고 정도를 택했습니다. 그 결과 해탈을 얻고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삿된 법을 믿는 인을 지으면 괴로운 윤회의 과보를 받고, 바른 법을 믿는 인을 지으면 그 과보는 해탈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지만 팥을 수확하고 콩을 거두는 것은 땀흘려 가꾸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 보리의 인(因)을 심고 열심히 가꾸어 다같이 성불이라는 열매를 거둡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청봉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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