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경전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온갖 중생은 제 번뇌의 지어진 업(業)에 의해,그 몸과 사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하나하나 제 몸과 사는 세계와 수용해 지니는 것을 스스로 이루는 것이 업을 제쳐놓고는 다른 무엇이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다.' <화엄경>

오늘은 지금 봉독한 <화엄경>말씀을 중심으로'스스로 창조하는 인생'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인생이라.'어찌 생각하면 당치않은 말 같기도 합니다.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인생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분도 있겠고,인생이란 팔자소관이라고 사주팔자탓으로 돌리는 분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인생'이란 말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45년간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에는 삼계와 육도라는 광활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그러나 이 삼계 육도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미혹한 중생들이 윤회하는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지 불가사의한 우주 전체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윤회와 관계없는 세계로 극락세계를 비롯하여 수많은 정토가 있고,윤회를 초월한 불보살의 세계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종생들은 과연 어떤 원인에 의해서,어떤 힘에 의해서 삼계육도를 윤회하면서 갖은 고통을 다 받게 되고,또 극락정토에 태어나 즐거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또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도 어떤 사람은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이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또 어떤 사람은 건강한데 그렇지못한 사람이 존재하는 등 이와같은 차별현상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부처님이 생사를 주관하고,행복과 불행을 주관하는 절대자적인 권력을 가지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경에'온갖 중생은 제 번뇌의 지어진 업에 의해,그 몸과 사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하나하나 제 몸과 사는 세계와 수용해 지니는 것을 스스로 이루는 것이, 업을 제쳐 놓고는 다른 무엇이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다'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인생과 우주의 온갖 진리를 깨달으신 분입니다.그러나 중생들도 진리를 깨들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부처님은 대각자이실 뿐 절대자나 주재자는 아닙니다.물론 부처님은 온갖 능력과 지혜와 복덕을 구비하셔서 우리 중생들과는 현격히 다른 분이시지만 그러나 생사를 주관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렇디면 우리네 사람의 주재자,우리의 삶을 운전하는 운전기사는 과연 누구일까요?바로 온갖 생명체 자신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를 표현한 말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온갖 생명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요,생사윤회의 주재자입니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바로 자신의 삶과 죽음,행복과 불행을 주관하는 주재자입니다.

그렇다면 사후에 태어날 곳을 누구나 자기 마음 먹은데로 선택할 수 있고,현세에서도 행복과 불행을 나름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우리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비록 자신이 사람의 주재자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없는 미혹한 중생이기 때문입니다.자신의 본성을 망각하고 거짓된 자기,망령된 자기를 본래의 자신으로 알고 착각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주재자로서의 능력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본문 경구 가운데 '온갖 중생은 제 번뇌의 지어진 업에 의해,그 몸과 사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하였는데,중생은 부처님과 달리 번뇌로 말미암아 선악간의 업을 짓게 되고 그 선업과 악업의 업력에 본래부터 간직한 주재자로서의 능력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성 자체인 자신의 본성품을 망각하고,번뇌로 인한 업력에 끌려서 살아가기 때문에 생사윤회의 주재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온갖 괴로움을 감수하면서 살아야하고,생사윤회에 끌려가고 있는 불행한 현실입니다.

<능엄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갖 중셍이 무시(無始)이래 생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다 제가 지닌 변화를 떠난 연원한 진심과 청정하고 밝은 본성에 대해 알지 못하고,여러 망상에 팔리고 있는 까닭이다.이런 망상이 진실하지 못하므로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영원히 변치않는 청정한 본성,즉 불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망령된 생각을 위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크게는 생사윤회라는 고통을,현실적으로는 온갖 괴로움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괴로운 삶의 수레바퀴를 계속 굴러가게 하는 것인가?부처님께서는 이미 앞서 본문에서 소개한바와 같이,'온갖 중생은 제 번뇌의 지어진 업에 의해,그 몸과 사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하셨고 또 '제 몸과 사는 세계와 수용해 지니는 것을 스스로 이루는 것이,업을 제쳐 놓고는 다른 무엇이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다.'하셨습니다.


즉 생사윤회의 주체,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낸 원흉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업입니다.

<업>은 범어 카르마(Karman)를 뜻으로 번역한 말인데,말과 행동,뜻으로 행하는 일체의 행위가 업입니다.즉 제 몸과 마음의 일체의 행동이 곧 업입니다. 단지 육체적으로 표현된 행동만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만해도 그것만으로도 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르 크게 셋으로 나누면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이를 신업,구업,의업이라고하여 신구의 삼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업이 도덕적으로 선이나 악이냐에 따라서 선업과 악업으로 구분하기도하고,또 그 행위의 주체나 과보가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경우와 여럿인 경우에 따라서 별업(別業)과 공업(共業)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업은 몸과 입과 뜻의 삼업(三業)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삼업을 세분하면 열가지가 되고 이를 십업이라고 하는데,이 업이 선한 업이면 십선업,악한 방향으로 나가면 십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사후의 세계가 삼악도냐 하는것은 어떤 주재자가 있거나 교통순경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열가지 업이 선업쪽에 기울어져 있느냐 아니면 그 반대에 속하느냐에 따라 이정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업(身業)은 우리가 몸으로 짓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살생과 도둑질,음행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구업(口業)은 입으로 짓는 업으로 거짓말,이간질하는 말,교묘하게 꾸미는 말,악담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의업(意業),즉 뜻으로 짓는 업은 탐냄,성냄,사견(邪見) 등이 있습니다.사견은 우치,즉 어리석음이라고도 하는데,구체적으로 말하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온갖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사견에 해당합니다.

이 열가지를 십악이라고 하고 그 반대는 십선이 됩니다.이 열가지의 악업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방생하고 보시하며 부드러운 말로 대중의 화합을 도모하고 넉넉한 마음과 바른 소견을 가지고 살아가면 곧 십선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온갖 생각은 업이 되어 생사윤회의 원동력이 됩니다.마치 자동차가 희발유를 연료로 굴러가듯이 중생은 업을 연료로 하여 생사윤회를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이 업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지난 세월에 지은 업의 과보가 오늘의 현실이요, 오늘 짓는 업의 과보가 미래에 맞이하게 될 새로운 환경입니다.

그래서 업은 업인(業因)이라고도 하는데,아무리 사소한 업이라도 결코 아무런 결과를 짓지 않고 스스로 없어져 버리지는 않습니다.


비록 현세에는 아무런 과보를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는 경우라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또한 금생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받는 과보가 단지 금생에 지은 업의 결과만이 아니라 과거생의 것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열반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갖 중생이 받은 고락의 과보의 모두가 현세의 업 때문인 것은 아니며,그 원인이 과거세에도 있었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세에 있어서 인(因)을 짓지 않는다면,미래에 받아야할 과(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무런 업도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깨달아 법답게 사는 경우,즉 불보살의 삶이 아니고는 선악간의 업을 짓기 마련이고 이에는 필연적으로 과보가 따르기 마련,다음생에 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가능한 한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짓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천당도 지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천당도 지옥도 부처님이나 어느 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요, 바로 우리네 중생의 업력이 만든것이고, 그 누가 있어서 천국행과 지옥행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에 의해 스스로 가서 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업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업은 단지 이승과 저승,생사윤회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모든 분야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이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제 이 업이 어떤 원칙에 의해서 행복과 불행을 불러오고 생과 사를 불러오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죽는 생사라는 큰 윤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윤회라고 하면 태어나고 죽는 일이 되풀이하여 벌어지는 현상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단지 생사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그 자체가 윤회합니다. 금생의 업이 원인이 되어 오늘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고,어제와 오늘의 업이 내일의 고락을 불러오는 현실 속의 인과응보는 소윤회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내일 다시 떠오르는 것도,춘하추동 사계절이 되풀이 되는 것도 자전과 공전이라는 천체의 윤회현상입니다.낙엽진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싹이 움트는 것,시든 꽃대 밑에 탐스런 열매가 맺히는 것은 식물의 윤회현상입니다.하나의 현상으로 그 존재가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면 윤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그러나 만물은 변화할언정 소멸되지는 않습니다.바로 이와 같은 현상이 윤회입니다.

아침에 출근한 남편이 저녁이면 잡으로 돌아오는 것도,주부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거의 엇비슷한 하루일과를 되풀이 하는 것도 윤회입니다.직장인이 매일 만원버스에 시달리면서 출퇴근하는 것도 윤회,이처럼 우리는 윤회속에서 살고 있습니다.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이 윤회의 틀 속에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아무런 기준도 없이 무질서하게 돌고도는 그런 삶이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는,또한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합니다.바로 인과의 법칙입니다.

뉴튼은 사과가 떨어지는 사실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온갖 존재는 서로 끌어당기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그러나 그후로 과학자들은 만물에는 단지 서로 끌어당기는 성질만이 아니라 서로 밀어내는 성질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온갖 물질에도 이와 같은 밀고 당기는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원인과 결과사이의 관계법칙, 원인에 의한 결과, 원인은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다른 결과를 불러들이는 순환법칙, 이 윤회 속의 법칙이 바로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겪는 삶의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어떠한 현상도 필연적입니다. 원인에 의한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냐랴'라는 우리네 속담은 우리의 삶이 바로 인과법칙에 의해 유지되고 있슴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이 인과법칙은 우리의 삶 속에서는 '선인낙과, 악인고과'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선한 일을 하면 즐거운 결과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괴로운 결과가 온다'는 지극히 상식적이 원칙입니다.

땀흘려 노력하면 그만한 대가를 받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고, 반대로 방일하여 불성실한 생활을 하면 고토스러운 현실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개미가 베짱이,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이 인과응보의 원리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인과응보의 원리, 인과법칙을 우화나 동화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양 착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치는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이부 빈익빈'을 자본주의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사응로 치부해왔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냉소적인 언어마저도 별 저항없이 받아들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인과법칙은 결코 허구적인 이론이나 교육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엄연히 현실 속에 내재하는 실제의 규율입니다. 단지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투명서에 따라 느낌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같은 호수라도 잔잔할 때와 물결이 출렁일 때는 호수에 비친 주변의 사물의 모습이 달리 보이듯 사회가 맑고 깨끗할 때는 인과법칙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사회가 어둡고 탁할때는 잘 들어나지 않는 치이 뿐입니다. 출렁이는 호수에도 삼라만상의 모습이 비추고 있듯이 어둡고 탁한 세상에도 인과응보의 원리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새정부가 들어서서 사정활동을 벌인 이후, 우리 국민은 비로소 인과의 법칙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처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 석연치 않는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과법칙이 가시적으로 들어 날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를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합니다. 우리는 정부에서 벌이고 있는 일련의사정작업을 지켜보면서 이를 통쾌하다거나 후련하다거나 하는 정신적인 위안을 삼는데에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를 타산지석을 삼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인과법칙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인>과 <과>를 되풀이하는 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대통령이라도 임기가 지나면 평범한 시민이 됩니다. 그러나 단지 평범한 시민으로, 대통령이 되기 전의 보통의 시민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을 지낸 시민으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즉 현실 속에서 생사윤회를 한 것입니다.

대통령만이 아닙니다. 전직 장관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가 마찬가지 입니다. 어제의 행위의 결과가 오늘의 나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루하루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윤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윤회요, 일생을 한 때로 하여 이루어지는 윤회현상이 생사윤회일 뿐입니다.

불자 여러분! 우리는 나밍 차려준 밥상을 받으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밥을 짓고 스스로 상을 차려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에 차별이 있는 것은 결코 부처님이나 실의 의사가 아닙니다. 그 누구의 탓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바 업력애 의한 과보일 뿐입니다. 오늘나ㅏㄹ 궁지에 몰린 몇몇 인사들의 고통은 그들이 과거 좋은 시절에 몸과 입과 마음을 함부로 한 없의 과보, 곧 인과응보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장본인은 결코 새조웁의 대통령도, 감사원장도 검찰부도 아닙니다. 바로, 그분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인생'일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인생의 주자는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잘못된 삶을 단절할수 있는 주인공도 바로 내 자신 밖에 없습니다.

우리 다같이 내자신이 내인생의 주인공이요,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이 내가 지은 업 때문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인과법칙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그리하여 스스로 인행의 주재자가 되어 괴로운 삶을 과감히 단절하고, 즐겁고 보람찬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올바른 불자가 됩시다.

성불하십시요!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야본사 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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