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 설산에 들어가 한번 앉아 6년을 지내시고 밝은 별을 보시고 도를 깨치시니 그 소식이 삼천세계에 두루하네

오늘은 싣달타라는 한 평범한 인간이 부처님으로 다시 태어나신 날입니다.성도절은 싣달타라는 한 왕자가 인간이면 누구나 흠모하는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늙고 병들고 죽는 일 없는 영원한 삶의 길을 찾아나선지 어언 6ㄴ년만에 그토록 갈망하던 참 삶의 길을 찾아내시고 인생의 진면목,우주의 대진리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발견하시고 드디어 불타가 되신 날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부처님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죽음과의 투쟁을 통해서,마침내 마왕 파순의 집요한 유혹도 물리치신 후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시어 불타가 되셨으므로<도를 이루었다>라는 뜻으로 성도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도는 석가모니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이 성취해야 하는 길입니다.왜냐하면 도란 길이요,이 길은 참되게 사는 길,생노병사를 뛰어 넘어 영원한 삶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 인간의 길,행복한 삶의 길을 최초로 발견하신 위대한 탐험가요,위대한 길 안내자,곧 대도사(大道師)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이 뜻깊은 성도절을 맞이하여,인간 싣달태자가 불타세존으로 새롭게 태어나신 그 의미를 재인식하고 성도절을 통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는 교훈을 되새겨 보도록 합시다.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분의 언행을 본받고 그 분처럼 되려고 하는 종교입니다.인간 싣달타,정반왕의 아들 싣달타,가비라 성주의 왕세자였던 싣달타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 싣달타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으신 불타,성도하여 불타가 되신 석가모니부처님을 신앙하는 종교입니다.그러므로 바로 2천6백여년전 사문 고오타마가 부리수 아래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시지 못했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부처님께서는 <묘법연화경여래수량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여래의 비밀한 신통력을 자세히 들으라.일체세간의 하늘과 인간,그리고 아수라들은 모두 석가모니불은 석씨왕궁을 나와 가야성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만,그러나 선남자들아,내가 성불한 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나유타 겁이니라."

석가모니부처님은 지금부터 대략 2천6백여년전에 중인도의 카피라성에서 숫도다아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태어나셨고,야쇼다라공주와 결혼하여 라후라라는 아들을 나으셨고,29세에 출가하신 후 6년이라는 긴 세월의 고행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마지막 용맹정진을 하시고,동녁하늘에 떠오르는 새벽별을 보시는 순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셨다라고 대부분 불자들은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묘법연화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이미 한량없는 오랜 옛적에 성불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왕자로 태어나시고,힘든 고행을 하셨으며 새삼스레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셨을까? 이상한 일이 아니가요?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해답 역시 경전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묘법연화경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불한지는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아승지 겁이지만 중생을 위하여,방편의 힘으로 멸도를 말하고 있으나 능히 법과 같이 설하였으므로 나를 허망하여 허물이 있다고 하지 않으리라."

이 말씀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것도 사실은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멸도 즉 열반상뿐 아니라 출생에서부터 출가.수도.성도.열반이 모두 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하시겠다는 대비심에서 펼친 장엄한 하나의 연극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임으로 결코 허망하다 할 수 없으며,진실한 법다운 연극이라는 사실도 또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언행은 그 모두가 중생제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부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성도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중생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셨을까요?오늘은 이 부처님의 이 깊은 뜻을 생각해 봅시다.

불자여러분! 우리 중생들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행복하기를 소원할 것입니다.그러면 구체적으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행복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권세와 재산에서 행복을 찾습니다.이 부귀영화를 얻기위해 친형제간에도 싸우고 부자지간에 원수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석가모니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나셨습니다.고대사회에서의 왕자의 신분이란 요즘의 대통령 자제와는 전혀 다른 신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권력세습의 왕조에 있어서 태자란 부와 권력이 보장된 신분입니다.따라서 사람들이 가장 소원하는 부귀영화는 이미 태어나실때부터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태자인 싣달타는 이 기득권을 버리고 수도의 길을 떠났습니다.이 출가상은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중생들아,너희들은 그토록 돈과 권력을 사모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의 ㅎ행복을 얻을수는 없는 것이다.보아라!나는 그것을 모두 버리고 떠나지 않느냐"

부처님은 출가상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결코 재산이나 권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 중생들이 가장 소원하는 부귀영화가 행복의 요건이 아니고,그것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어린이가 좋아하는 사탕을 못먹게 하려면 사탕대신에 어린이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재산이나 권세,명예,지위가 사름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인생을 값지게 할 수 있을까?그 대안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만인 대안인 없다면 인생이란 비참한 것이고,허무하기만 한것이며,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부처님은 성도를 통해 연출하셨던 것입니다.성도는 재산과 권력 사치와 향략으로도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신 참으로 멋진 연극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성도절을 단순히 싣달태자가 간난신고 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날,새벽에 반짝이는 밝은 별을 보시고 진리를 깨달으신 날 이렇게만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절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깊고 깊은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바로 이 숨은 뜻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에게 인생의 근본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싣달타는 왕궁을 빠져나와 그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수행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지도를 받습니다.이때는 이미 싣달태자가 아닌 사문 <고오타마>로서 열열한 구도행각을 펼칩니다.처음에 찾아간 스승은 고행주의자인 <바가바>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행목적은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는 것으로 고오타마의 출가목적과는 달랐습니다.고오타마는 그들과 작별하게 됩니다.삳달태자가 출가한 목적은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지 죽어서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사문 고오타마는 불을 숭배하는 사화외도의 수행자를 찾아 갔습니다.고오타마는 거기서도 실망하고 다시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섰는데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은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라마풋다>라고 하는 선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그 당시 인도사회에서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수도자였습니다.그러나 그들에게서도 만족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출가수도승이 된 사문 고오타마는 여러 수행자들을 방문한 결과 그 누구에게서도 인생의 근본대사인 생노병사에 대한 해답을 기대할 수 없고,이 문제는 오직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뿐,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사문 고오타마는 홀로 나란자라강가의 고행림을 찾아가서,외로운 구도의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생사에 대한 근본문제는 결코 남의 가르침이나 스승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요즈음 홀로서기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다고 하는데 이 말도 자기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두번째로 부처님께서는 성도절을 통하여 성도를 위해서는 중도의 수행을 해야한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선정주의자들을 찾아가셨는데 그곳에서 한동안 맹렬히 수행을 하셨습니다.그 결과 얼마가지 않아서 선정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에 이를수 있었습니다.그들의 목표인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에 도달하고 보니 그들의 이상은 수행상 하나의 과정일뿐 수행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선정상태에 들어 있을때는 정신이 통일되어 몸과 마음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항상 선정에만 머물러 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선정주의자들과 작별한 고오타마는 고행림이라 불리는 숲속에 들어가셔서,그야말로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행을 시작하셨습니다.이때 고오타마가 한 고행은 앞서 말한 외도들의 고행과는 그 목적이 달랐습니다.

외도들은 육체를 학대함으로써 그 댓가로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고오타마는 생노병사를 해결하고,진리를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이 때의 고오타마의 고행은 필설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것이렀다고 합니다.

큰 절에 가면 흔히 팔상성도하는 부처님의 일대기가 벽에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벽화 가운데 설산수도상이라하여 뼈와 가죽이 달라붙고 갈빗대가 툭 튀어나온 그림이 있습니다.이 그림이 바로 부처님이 고행하실때의 참혹한 모습입니다.이 고행기간이 무려 6년이라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오타마는 결국 이 고행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고행으로 도를 이룰수 없음을 아시고 6년동안이나 그토록 집착했던 고행도 과감하게 버리십니다.

선정이라는 극단적인 정신일변도의 수행만이 아니라 고행과 같은 육체일변도의 수행도 올바른 수행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을 통해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하는가? 고행을 버리신 고오타마는 수자타라는 처녀로부터 우유를 받아 마시고 강물에 몸을 씻은 후 건전한 심신의 상태를 회복하셨습니다.그런뒤 마지막으로 결심을 하시고 보리수 아래에 정좌하시어 일주일간 용맹정진하신 끝에 마침내 성도하시게 됩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어떤 태도로 수행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바로 중도의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세번째로 부처님은 성도를 통하여 생사의 근원이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사상계는 우주의 근원,인생의 근본을 <브라만>이라는 유일신에게 있다고 보거나,아니면 다수의 물질적 요소에 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인간을 괴롭게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요인이 결코 신이나 물질같은 외부적인 것에 있지 않고 자기자신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으셨고 성도를 통하여 그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성도하시기 직전까지 마왕 파순의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마왕 파순은 천마(天魔)중의 우두머리로 욕계 제6천인 타화자재천이라는 곳의 주인입니다.그러나 삼계(三界)가 오직 이 한마음의 소작이므로 타화자재천도,마왕 파순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한 모습일 따름입니다.

마왕은 바로 무명(無明)이요,팔만사천 마왕의 권속들은 바로 중생들의 팔만사천 번뇌,망상입니다.이 번뇌,망상을 극복하고 청정본연의 자성을 찾아내는 일이 바로 성도요,성불입니다.무명이라는 마왕으로 부터 파생한 헤아릴 수 없는 번뇌망상이 우리의 자아를 덮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참 성품,참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번뇌,망상이 경전에서는 때론 예쁜 여인으로 때론 창칼을 검어 쥔 험상궂은 병사로 변화하여 성도를 목전에 둔 고오타마에게 갖은 유혹과 협박 회유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무명은 애욕과 공포라고 합니다.애욕은 무엇을 하고자하는 근본 욕구로,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이 애욕이 모든 행동의 근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애욕 다음으로는 두려움을 근본 무명으로 들 수 있는데 이 공포는 생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본능입니다.사람들이 어떤 극한적인 상황에 부딪쳤을때,이른바 한계상황에 이르면 애욕보다는 공포를 더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문 고오타마가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해야 했던 상대는 어떤 신도 아니요,물질도 아니요,오직 자기자신의 본능적인 욕구인 애욕과 공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오타마는 이 근본욕망인 무명을 극복하고 마침내 새벽하늘에 찬란히 반짝이는 별을 보시는 순간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다름아닌 아뇩다라삼막보리,무상정등정각,우리말로는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입니다.

이 무상정등정각이란 외부의 대상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고 석존 자신의 내부에 간직된 진실한 자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그 깨달음의 결과로 우주와 인간,온갖 사물의 이치를 바로 보게 된 것이지 깨달음이 외부의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화엄경에서 일체만법 유심소조(一切萬法 唯心所造)라고 하셨듯이 일체를 만들어내는 근원인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으로써 만법의 근원을 통달하신 것입니다.

끝으로 부처님의 성도를 통하여 우리 중생들에게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부처님께서 처음부터 붓다로 태어나신것이 아니라 평범한 범부로 태어나신 후,갖은 번뇌망상에 시달리시고 마침내 출가하시어 수차의 시행착오를 거치시고 비로소 바른 길을 택해서 수행하신 뒤에 마침내 성도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도 부처님처럼 바른 길만 찾아서 용맹정진하면 누구나 성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이신 것입니다.처음부터 중도를 걷지 않고 굳이 굽은 길을 돌아서 목적지에 가신것도 바로 이와같은 깊은 뜻이 있다고 봅니다.

불자여러분!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성불하자는 종교입니다.하늘나라에 태어나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지하여 현세에서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고,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나아가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생사윤회를 단절하고 이 땅에 불국정토를 이룩하자는 이상을 갖고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만나고 헤어질때마다 하는 인사가 <성불합시다>입니다.이 인사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우리는 반드시 성불할 수 있고,또 성불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냉정히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때 참으로 성불에 대한 희망을 갖고 절에 다니는 불자가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성불은 우리네 범부들이 완전한 인간,근심 걱정이 없는 행복한 인간이 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는한 기필코 이룰수 있는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을 계기로 새삼 인식해야겠습니다.

법화경에 보면 아주 오랜 옛적에 <상불경보살>이라는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이 분의 이름이 상불경인데 왜 상불경이라 했느냐하면 그분은 만나는 사람마다 예배하고 찬탄하기를,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하고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반드시 성불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항상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상불경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우리 모두는 반드시 성불을 할 수 있는 불자입니다.그러나 스스로 자기자신을 낮추어서 <내가 어찌 감히 성불을 바라리요!>하고 체념해 버리기 때문에 성불의 길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곧 성불입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성도하는 시범을 보이신 날,성도절입니다.우리 모두 금년 성도절을 계기로 모든 사람이 부처님 되실 분이라 생각하고 서로 존경함으로써 우리 자신 가운데 간직된 부처성품이 빛을 내뿜도록 하여 성불하도록 힘써 정진합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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