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참으로 요지경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고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탐욕과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 듯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욕망은 요즘 세상 만이 아니라 부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의 몸에 바람병이 생겼습니다. 의사 지바카는 부처님을 위해 약수(藥酬)를 만들어 바치고 하루에 32냥씩 자시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데바닷다는 마음으로 시기하여 자기도 부처님과 똑같이 약먹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의사 지바카에게 "나를 위해 약을 만들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하루에 약을 얼마씩 자시느냐?" "하루 서른 두냥씩 자십니다." "나도 그만큼 먹겠다" "당신 몸은 부처님의 몸과 같지 않습니다. 당신이 많이 드시면 다른병이 생길 것입니다." "내 몸이나 부처 몸이나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 주기만 해라. 나도 먹으면 넉넉히 소화시킬 수 있다."

결국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따라서 하루에 서른 두냥씩 약을 먹었는데, 그 약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마침내 중병을 얻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입니다. 부처님은 정반왕의 아드님으로 태어났고 베바닷다는 숙부인 곡반왕의 아들인데 아난존자의 친형이 됩니다. 그는 몸에 부처님처럼 32상을 갖추었고 출가하여 여러 가지 신통력가지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와같은 사람이 어찌 약먹는 것까지 샘을 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을까,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죽을 못쓰는 보약도 아니고, 감기에 쌍화탕같은 치료약을 샘을 내서 똑같이 먹으려고 했을까 하는 의심이 들면서도 또다른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환경이 전혀 다르면 아예 처음부터 못오를 나무로 치부할텐데 엇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처님 자리를 넘보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무당이라도 무당은 무당이니까 무당굿을 흉내낼 줄 알기에 죽을 사람 살린다고 요령 흔들다가 황천으로 보내듯이 데바닷다도 부처님처럼 32상을 갖추고 신통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감히 부처님 자리를 넘보고 자신이 주인노릇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하는 모양을 보면 너도나도 데바닷다를 닮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지도자요, 모두가 잘난 사람들 뿐입니다.

"소꼬리보다는 닭머리가 났다"는 속담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인지 임제스님의 수처작주(隨處作主)를 잘못 이해한 탓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주인노릇만하려고 하는 현실을 보면서 새삼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금강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되나니, 이른바 세상에 있는 온갖 중생인 난생.태생.습생.화생과 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두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게하리라.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받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어떤 보살이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보살이란 자기 자신 보다는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종교적인 개념을 떠나서 우리 현실 속에서 보살에 해당할 직업을 찾는다면 정치지도자나 교육자가 마땅히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돈벌어 저 잘 살려고 정치한다는 사람 보았습니까? 국회의원이건 대통령이건 입후보자는 한결같이 자기를 희생하여 나라와 국민을 위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의당 그들은 보살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부처님 말씀을 정치가에게 알맞게 바꿔보면 이렇습니다. "정치가는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모든 국민을 잘 살게 하리라. 그러나 모든 국민이 다 잘 살게 되더라도 내가 잘 살게 만들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정치가가 스스로 잘났다는 생각을 하면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습니까? <정치가 헌장>으로 채택할만 하지 않습니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란 교리적으로는 복잡한 해설이 필요하겠지만 결국은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망상을 말합니다. 자기가 남보다 잘났다고 하는 생각이 상(相)입니다. 여기서 온갖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원망과 투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무시하고 괄시하는 것입니다. 데바닷다가 의사 지바카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처님의 몸과 내 몸과 무엇이 다르냐? 고 한 그 마음이 바로 제 잘났다는 생각, 곧 아상입니다. 이런 아상이 있으면 수행자는 참 수행자가 아니고 정치가는 참 정치가가 아니고, 교육자는 참 교육자가 아니며, 그런 의사는 참 의사가 아닙니다.

가짜 정치가요, 가짜 교육자요, 가짜 의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둘러보면 이런 가짜들만 득시글거리고 진짜는 어디에 꼭꼭 숨어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하기사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가짜일수록 매스컴을 타는 현실이므로 진짜는 있어도 알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도 한 중생도 제도받은 이가 없다는 생각을 해야만 보살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국민을 잘살게 만들고도 내가 국민들을 잘살게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만 진정한 정치인입니다. 그런데 국민들 잘살게 하기는 커녕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고도 자기만 잘났다고들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비단 정치인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각성해야 합니다. 특히 이 일은 우리 불자들이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실천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모두 보살아닙니까? 보살님 칭호를 두개, 세개씩 받고 있는 보살들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앞장서서 보살노릇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먼저 남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상을 버린다는 것은 곧 남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왜 남을 인정해야 하는가? 모두가 보살이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부처님이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본래부터 타고난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난 법회에서는 "서로 믿고 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고 사는 사회란 곧 서로 서로를 인정하는 사회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서로를 인정하자는 것이냐 하면 자기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데바닷다는 자기를 내세우는 마음이 강해서 부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인격을 갖춘 부처님을 자기와 같은 위치로 깎아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앞의 일화에서는 감기약 실컷 먹고 배탈난 정도였지만 종내는 그 마음이 더욱 사나와져서 마침내 세가지 큰 죄를 짓고 살아서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평등이라는 말처럼 잘못쓰이는 말도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평등하다고 하는 절대평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평등은 본질에 있어서 똑같다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똑같다는 평등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데바닷다나 생명의 본질상에 있어서는 추호도 다름없지만 싯달타는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고 데바닷다는 부처가 되지 못했음으로 현실적으로는 엄연히 차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현실을 바로 보아야만 평등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데바닷다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일화가 많지만 "머리 둘 달린 새"의 설화는 우리의 사회현상을 견주어 볼 때 참으로 많은 교훈을 주는 설화입니다.

아주 먼 옛적에 히말라야산 기슭에 몸뚱이는 하나인데 머리가 둘 달린 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새의 머리에 이름을 붙여 한 쪽은<카루다>라 했고 다른 한 쪽 머리는<우바카루다>라고 했답니다. 이 새는 한 쪽 머리가 잠자고 있을 때는 다른 한 쪽 머리가 깨어서 망을 보는 등 교대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우바카루다 머리가 잠을 자고 카루다가 깨어 있는데 휘익 하고 바람이 불어오더니 바람결에 마즈카라는 나무에서 꽃송이가 날아와 카루다의 부리 앞에 떨어졌습니다. 카루다는 향기가 나는 그 꽃이 먹음직스러워 덥석부리로 찍으려다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혼자서 이 꽃을 먹는다면 우바카루다가 나를 욕할 것이다 먹지 말아야겠다. 가만있자, 그게 아니다. 우리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프다. 내가 혼자서 이 꽃을 먹더라도 뱃속에 들어가면 우바카루다도 같이 힘을 얻어 허기를 면하게 될 것이 아닌가!"

카루다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자고 있는 우바카루다에게 알리지 않고 그 꽃을 쪼아 먹었습니다. 얼마후에 우바카루다가 잠에서 깨어났을때, 이상하게도 배가 불러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배가 부르다니......아니, 카루다가 혹시 혼자서 무엇을 먹은 게 아닐까?"

우바카루다는 의심에 찬 눈으로 카루다를 노려 보면서 말했습니다. "카루다야 너만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었구나?"

그러자 카루다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화내지 마라. 잠자는 너를 깨우기가 미안해서 나혼자 먹은 것이다. 어차피 뱃속으로 들어가면 결국 너나 나나 다같이 기운을 얻을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거야." 그러나 우바카루다는 카루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둘은 사이가 아주 나빠졌지만 서로 헤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몸이 하나로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꽃이 만발한 한 나뭇가지 하나가 하늘하늘 움직이면서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러나 그 꽃나무는 독나무였습니다. 우바카루다는 곤하게 잠들어 있는 카루다를 슬쩍 훔쳐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카루다 몰래 이 꽃잎을 먹으면 카루다는 죽어 버릴 것이다"

우바카루다는 얼른 독나무 꽃잎을 두눈을 꼭감고 먹어 치웠습니다. 얼마 후 카루다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상하게도 속이 뒤틀렸습니다. 고통스럽긴 우바카루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다같이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카루다는 우바카루다가 자기가 미워서 독이든 꽃잎을 먹은 줄 알고는 슬픈듯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언젠가 솔솔 불던 바람 맛있는 꽃잎 하나 떨구었네 바람에 실려온 꽃잎은 혼자먹은 친구를 미워하여 분노의 불꽃을 지폈네. 헛되이 남을 원망함이여 결국은 독꽃잎으로 피어나 우정도 목숨도 앗아가네.

이 설화의 카루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前身=전생의 몸)이고, 우바카루다는 데바닷다의 전신이었다고 합니다. 이 설화는 원한은 돌고돌아 삼세에 걸쳐서 윤회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의도에서 설해진 것입니다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은 마치 이 설화의 주인공인 두 머리 달린 이상한 이름의 새처럼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설화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동체대비심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한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한 몸이므로 사랑한다"는 뜻이 더 적당한 표현입니다. 마치 우리 몸에 있어서 손가락을 상하거나 발가락을 상하거나 간에 다같이 아픔을 느끼듯 모든 중생의 슬픔을 바로 부처님 자신의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자비심이 동체대비심입니다.

우리 범부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자식을 둔 부모는 어렴풋이 이해가 갈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식의 불행을 자신이 대신하려고 하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동체대비심인데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바로 하나의 몸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설화에 나오는 두 머리 달린 새의 경우처럼 비록 머리는 헤어릴수 없이 많지만 그 몸만은 다같은 부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의 불신(佛身)임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요즘 심각해진 공해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공해로 오염된 산천에서는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짐승만이 아니라 쓰레기를 버린 사람도, 버리지 않은 사람도 결국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바로 자연이라고 하는 하나의 몸뚱이를 우리는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당과 야당은 마치 설화에 나오는 두 머리의 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당은 카루다는 없고 우바카루다만 있는 것 같습니다. 못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속셈인지 아니면 우바카루다처럼 상대편이 미워서인지 다같이 독이든 꽃잎을 서슴없이 삼켜버린 꼴입니다.

여당은 국회에서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각종 법안들을 무더기로 날치기 통과시킴으로서 우바카루다와 같은 짓을 범했습니다. 여기에 맞서 야당도 국회의원직을 내던짐으로서 역시 우바카루다의 기질을 여실히 발휘한 것입니다. 우바카루다는 바로 데바닷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찌 되었던 독이 든 꽃잎을 삼킨 결과는 미운 머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함께 죽는다는 사실이요, 그보다는 머리만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같이 배가 튀틀리고 마침내 온 몸 전체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머리야 서로 싸우다 죽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애매한 몸뚱이가 왜 날벼락을 맞아야 합니까? 그런데 두 머리가 여당과 야당이라면 몸뚱이는 누구입니까? 바로 국민들이 안닙니까? 이런 현상은 여당.야당만이 아닙니다.

야당끼리도 통합을 한다고 하면서, 통합만이 국민을 살리는 길이라고 소리높이 외치면서 모두가 부처님 자리를 넘보던 데바닷다처럼 자기만 잘났다고 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않으면 독이 든 꽃잎이라도 집어 삼킬 기세들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안됩니다.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하루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서로 자기만 잘났다고 싸워서는 안됩니다.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도라 하는데, 중도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이란 뜻이 아니라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남의 의견도 수용할 줄 아는 것이 중도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하루속히 이성을 되찾아 머리 둘달린 새와 같이 함께 죽는 비참한 최후는 막아야 할 것입니다.

통일문제도 이 설화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합니다. 남이든 북이든 우바카루다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같은 배달민족이 아닙니까?

너무도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고,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지 걱정스러워서 주제넘게도 정치문제를 거론했습니다마는 이제 우리 불자들도 옛날처럼 <잘되겠지>하는 방관자의 자세를 버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동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정치가들을 불러다가 호통을 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작은 일에서 부터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보살행입니까?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워 이를 실천하고, 조금도 그런 상(相)을 내지 않아야 보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모든 사람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남편 내 부인부터 내 자식 내 부모부터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은 존경심에서 오고 남을 존경하는 마음은 자기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생기지 않습니다. 나를 낮추는 생활이야말로 바로 상(相)을 떠난 보살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 다같이 우리 마음 가운데서 데바닷다의 탐욕을 버립시다. 우리 마음 가운데서"너죽고 나죽자"'는 우바카루다의 마음을 씻어 냅시다. 우리 다같이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하고 함께 잘 사는 불국정토를 이룩하도록 동체대비심을 발휘합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 편

법 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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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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