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윤회의 실상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중생이 삼도육계를 윤화하는 까닭은 제자신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진여불성을 간직한 줄 모르고 망상을 일으켜 온갖 번뇌와 업을 짓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기억하고 계십니까?

또한 중생이 윤회하는데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선인선과.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즉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오늘은 지난번에 이너 "인과법을 믿는 불자가 되자"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불교는 인과법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인과를 믿고 이를 깨닫고 실천하는 일 외에 별다른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부처님의 일생동안 말씀하신 법문 가운데 아함경은 우리 생활과 직결되고 가장 알기 쉬운 법문인데 경의 내용은 거의 모두가 인과에 관한 말씀입니다.

불교의 기본교리인 사제.십이인연.팔정도.삼학의 가름침은 모두가 인과의 법칙을 근본으로 하고 이를 원리면.실천면에서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반야경이나 법화경 화엄경 등이 아주 차원이 높은 철학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인과와 무관한 듯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큰 착각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문수보살과 보수보살이 이런 문답을 나눈는 대목이 있습니다. 문수보살이 보수보상에게 묻기를, "불자여,(사람은)똑같이 흙.물.불.바람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다같이 나와 내것이 없는 터인데,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괴로움울 받고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받으며,어떤 사람은 단정하고,어떤 사람은 추악하며,어떤 사람은 현세에서 과보를 받고 어떤 사람은 후세에 가서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까?

이에 보수보살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행위에 따라서 과보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맑은 거울이 그 대하는 사물의 모양에 따라 비추는 모습이 각기 다른 것과 같습니다.업의 본성(本性)도 이와같아 밭에 뿌려진 씨가 각기 스스로 느끼지 못하지만 저절로 싹을 틔우는 것과도 같으며.환술사(幻術師)가 네거리에서 여러 몸을 나타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 열반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선악의 보(報)는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다.그리하여(과거.현재.미래)삼세의 인과가 휘몰아 없어지는 일이 없으니,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으리라."

법화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갖 욕망으로 삼악도에 떨어지고 육취(六趣)속을 윤회하며 고루 여러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경전에 인과에 대한 간곡한 말씀이 많은데도 일체의 법이 공하여 너도 없도 나도 없는데 어디에 인과가 붙느냐?인과법은 어린애들의 울음을 달래기 위한 사탕발림과 같은 낮은 수준의 방편품법문이다-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자로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인과를 부정하면 한마디로 불자가 아닙니다.인과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 악도로 끌고 가므로 큰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백장(百丈)이라는 유명한 선사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이 설법을 할때마다 한 노인이 늘 청중들 뒤에서 열심히 법문을 듣고 있다가 법문이 끝나면 사라져 버리고는 했습니다.그러던 어느날은 법문이 끝나도 대중이 모두 물러난 다음에도 법당에서 나가지 않고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백장스님이 이상히 여겨 주구냐고 물었습니다.그러자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사람이 아니올시다.옛적 가섭 부처님께서 계실 때,이 절의 주지였습니다.그때 어느 학인이 묻기를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안떨어집니까?'하기를 제가 '안떨어지다'라고 했기 때문에 5백생동안 여우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청컨데 스님께서 이 여우 몸을 벗어날 법문을 들려주십시오"하고는,"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안떨어집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백장스님은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이 말을 듣는 순간 노인은 말끝에 크게 깨쳐,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저는 이미 여우의 몸을 벗어나 뒷산에 있으니 스님께서 저를 죽은 스님처럼 장사지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백장스님은 대중들을 이끌고 뒷산으로 가 바위밑에서 죽은 여우의 시체를 찾아내 스님처럼 화장을 해주고 저녁에 법당에 나와서 대중들에게 그 여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서 황벽스님이 일어나 "고인이 잘못 대답하여 오백생 여우의 몸이 되었다는데,만약 옳게 대답했더라면 무엇이 되었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백장스님은 말하기를"이리 가까이 오너라.그대를 위해 가라쳐주리라"했습니다.

황벽은 백장스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갑자기 백장스님의 빰을 후려쳤습니다.그러나 백장스님은 당돌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황벽의 행동을 탓하지 않고 박수를 치며 크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과연 그렇구나.오랑캐의 수염이 붉다더니 붉은 수염의 오랑캐가 있구먼"하였습니다.

자! 여기서 처음 이야기는 알 것 같은데 뒤에 가서 황벽스님이 백장스님의 빰을 갈기고,또 백장스님이 웃으면서 오랑캐수염이 어쩌고 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지요?

이 일화는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하는 참선에 관한 책에 나오는 일종의 화두(話頭)이기 때문에 이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뒷부분은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시도록 접어두고<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와<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려고 하는데,기왕에 화두를 소개한 김에 한마디 사족을 달자면 선의 입장에서 보면 요컨데 무엇이 인과를 깨닫고,인과에 어둡지 않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무엇이 인과를 깨닫고 인과에 어둡지 않고 합니까?그 주인공이 무엇입니까?

황벽스님이 백장 큰 스님의 빰을 갈긴 것은 바로 그 주인공이 작용한 것에 불과합니다.여러분도 그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큰 스님의 빰을 갈겨도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그렇다고 제 빰을 갈기지는 마십시오.

어찌하여-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이 말이 오백생 동안이나 여우 몸을 받지 않으면 안될 만큼 큰 죄가 되고,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이 한마디가 여우 몸을 벗어버릴 수 있는 큰 위력을 가진 법문이 되는가?

물론 이 설화는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백장스님이 제자들에게 인과를 믿게 하려고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이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우리는 새겨 들어야 합니다.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말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인과법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부처님도 인과법을 깨달으신 것이지 인과법을 창조하시거나 고치거나 또는 없애는 분이 아닙니다.부처님이 성불하시어서 윤회를 끊고 이 우주에 자유자재하게 법신으로 상주하시는 것도 성불이라는 원인이 가져온 결과 즉 과보인 인과법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이지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해서 법력이 높은 도인이라도 인과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윤회를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그렇지만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인과법칙에 의한 것입니다.수도의 결과 자성을 깨달아 윤회의 주체를 깨닫고 이를 주체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윤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것도 역시 깨달음이라는 인이 가져온 과보이므로 인과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은 인과에 어둡지 않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뜻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인과경에"전생에 지은 인(因)을 알고자 하는가?금세에서 받고 있는 과(果)가 이것이다.후세에 받을 과를 알고자 하는가?금생에서 만드는 인이 이것이다."하였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들이 이와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오늘을 살아간다면 이는 인과에 어둡지 않는 삶이 되는 것이고,비록 아무리 수행을 오랜세월 쌓은 사람일지라도"인과란 없다,이정도 수행했으면 그까짓 인과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이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헛된 노력일 뿐입니다.따라서 수행을 많이 했다거나 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거듭하는가 하면 불자들 가운데는 불교는 인연법이다 하면서도 인과를 무시하는 사람이 많고,옛 큰 스님들의 파격적인 행동을 마치 인과를 무시한 행동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원효대사가 파계를 했다던가 진묵스님이 술을 마시고 여자를 희롱했다던가 하는 일화들이 마치 인과를 무시한 행동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하신 걸림없는 행동은 중생교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지 인과를 부정한 것은 아니요,설사 그분들이 인과를 부정했다고 할지라도 인과는 엄염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정행소집경(正行所集經)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숙인금과(宿因今果)가 터럭만큼도 어김이 없이 인 때문에 과를 받게되는 것이니,과는 인과 같게 마련이다.이를 똑똑이 마음에 새겨서 여러 의망(疑網)을 제거해야 한다.선악의 업보란 거짓이 없으며,그 형세가 사나운 물살과 같아 멈추지 못한다.저 업력 때문에 그 보(報)를 각기 불러 들이는 것이니,복인(福因)을 스스로 지으면 낙과(樂果)를 받게 되리라.백천겁(百千劫)을 지낸다 해도 저 업(業)은 파괴되는 일이 없어서 인연이 결합되는 때가 되면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된다."

<숙인금과>란,과거세에 지은 인(因)때문에 금생에 그 과를 받는다는 뜻이고,<의망>이란 의심이 그물처럼 얽혀있다는 뜻입니다. 인(因)은 원인이요,과(果)는 결과라는 말이니 현대적인 말로 하면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거센 물결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우리는 해마다 홍수로 물난리를 겪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는데 홍수 때마다 밀려드는 거센 물결을 막을 재간이 있습니까?인과의 물결도 마치 성낸 물결과 같아서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하는 속담처럼 원인없는 결과란 있을수 없습니다.'처녀가 아기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말도 거기에는 피치 못할 사연 즉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이처럼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이 인과법입니다.

또 인과법은 '콩 심은데 콩 나고,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복이 될 인연을 심으면 반드시 복락의 과보를 받게 되고,괴로움의 씨앗을 심으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인이란 씨앗과 같습니다.씨앗을 땅에 심으면 적당한 습기와 공기를 흡수하여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데,무슨 씨앗을 심었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다를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콩을 심었는데 팥이 열렸다던가 녹두가 열렸다면 이는 분명 거짓말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그렇지요?

아무리 세월이 바뀌고 과학이 발달해도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근본 원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사랑은 언젠가는 이별을 가져오기 때문에 결국 눈물이라는 과보를 불러 일으키는 눈물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만해스님의 시 <님의 침묵>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니 않은 것은 아니지만/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으로 터집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중간에 헤어질 수도 있고,비록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꼭붙어산다고 해도 죽을 때는 손잡고 갈수가 없지 않습니까?그러므로 사랑한다 하는 것은 이별의 열매를 키우는 씨앗인 것입니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고,선한 행위를 하면 즐거운 과보를 받고,악한 행위를 하면 고통이라는 과보를 받는다는 이 인과법을 믿어야 하는데도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데는 까닭이 있다고 봅니다.

무슨 까닭이냐? 어떤 사람은 부처님이나 보살님처럼 선한 일만 하는데도 지지리도 가나하게 살고,어떤 사람은 놀부 빰치게 불량한 짓만 하는데도 호화스럽게 떵떵거리며 잘사는 현실을 볼 때 아무래도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믿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아마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모두 해보셨들 것입니다.법구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사스러운 사람도 복을 만난다.그 악이 익지않을 때까지는/그러나 그 악이 익음에 미쳐서는 스스로 죄를 받아야 한다.상서러운 사람도 재앙을 만난다.그 선이 익을 때까지는/그러나 그 선이 익음에 미쳐서는 반드시 복을 받게 된다."

선.악 간에 두드러진 행위를 하면 당장 그 과보를 받지만 두드러지지 않는 행위는 한동안 세월이 흘러야만 과보를 받게되므로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과법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지않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인과의 법칙은 엄연히 존재합니다.부처님은 이 인과의 도리를 깨치시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불자들은 누구나 인과법을 철석같이 믿어야 합니다.

다음 법회때에는 인과를 믿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마칩니다.우리 다 같이 인과를 믿는 진정한 불자가 됩시다.

성불하십시요!

불교설법연구원편

법 천 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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