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누구시냐? 또는 보살님이 무엇이냐? 중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전혀 모른다고 하는 불자는 아무도 없으리라고 봅니다.그러나 막상 부처님이란 어떤 분이냐? 하고 누가 질문한다면 우물쭈물하지 않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기독교인들은 "여호와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서슴없이 '여호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제하시는 창조주요,조물주다'그러면 예수는 누구냐? 하고 물으면 '그리스도는 곧 구세주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도들은 '부처님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 우물쭈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부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부처님을 믿으라고 권할 수 있겠으며,부처님을 믿으라고 권할 수 없다면,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포교가 되겠습니까?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또한 팔만대장경이란 풍부한 포교자원이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포교가 잘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냐 할 때,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에 대해서 불자들의 확신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요?

언젠가 전철안에서 기독교단체에서 배포한 팜플렛을 무심코 들여다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다" 그 밑에 해설을 붙였는데.<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를 마른 똥막대기라고 한다>고 써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를 마른 똥막대기라고 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거짓으로 지어 낸 말이 아니라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스님들이 그런 표현을 썼던 것이 사실입니다.

일부 기독교인에게 불교 비난의 좋은 구실을 만들어준 "마른똥막대기"는 사실 <간시궐>이라는 화두(話頭)입니다.화두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참선하는 이들이 산란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해서 견성(見性)을 하기 위해 오직 일념으로 생각하는 의심덩어리가 화두입니다.

옛날 중국에 운문(雲門)이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널리 이름이 난 큰 스님인데 어느 때 한 이름없는 스님이 찾아와 운문스님에게 물었습니다."여하시불(如何是佛),어떤 것이 부처입니까?"그러자 운문스님은"간시궐(幹屎獗),마른 똥막대기이니라"

이 문답이 "간시궐"이라는 화두가 된 것입니다.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마른 똥막대기라고 뜻밖의 대답을 한 것입니다.'간시궐'이란 옛날 절 변소에서 쓰던 뒷씻개를 말합니다.요즘에는 화장지도 부드러운 것이 아니면 쓰지를 않지만 아주 옛날에는 막대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그것도 일회용이 아니라 변소안에 마련해 두고 여러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화장지 대용의 마른 나무막대기가 '간시궐'이므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물건이라는 뜻으로도 쓰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질문한 스님이 바로 그 뜻을 알아차렸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왜 부처를 그 더러운 마른 똥막대기라고 했는가?'하고 의심을 하게 되겠지요,그렇잖아요?

만일 믿고 존경하는 스님이라면,왜 그런 대답을 하셨을까? 하고 한번 더 깊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의심이 간절하면 결국은 마음에는 오직 이 의심만 남게 되는데,이토록 간절한 의심을 갖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회두입니다.이것을 화두로 삼아 오직 일념으로 이 의심만 품게 되면 마침내는 운문스님이 부처를"간시궐'이라고 한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것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문제가 아니요,운문스님이 부처를 '간시궐'이라고 했다고 해서 부처의 존재를 부정했거나,부처님의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참선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불성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부처'라고 묻고 대답한 것은 부처님이라는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분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근본이요,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불성에 대한 대화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전후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불교인도 부처를 마른 똥막대기라고 한다'하는 식으로 비난한다는 것은 그들이 무지해서거나 아니면 의도를 가지고 불교를 비방하기 위해서겠지요.

이런 일화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이런 질문에 대해 조주스님은 정전백수자(庭前柏樹者),즉 '뜰 앞에 잣나무'라고 대답했고 동산스님은 마삼근(麻三斤),즉 삼 세근'이라고 대답했습니다.구지스님은 단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일 뿐이었습니다.또 어떤 스님은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무조건 주장자로 내리치셨습니다.주장자가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몽둥이 입니다.몽둥이로 무조건 내리치는 것으로 질문에 대답한 것입니다.이것을 방이라고 하지요,또 어떤 스님은 '악'하고 외마디 소리로 대신했는데 이 외마디소리를 고상한 말로'할'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부처에 대해서 정의하는 것은 선문답(禪問答)입니다.선문답이란 이론적으로 부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의 본 성품인 불성을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런 식의 대답은 견성을 한 도인이 아니면 할 수 없고,또 질문하는 상대가 불교적 소양이 깊은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부처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을 할 때,'마른 똥막대기다'한다거나 '뜰 앞의 잣나무니라'또는 손가락만을 내보인다거나 몽둥이를 휘두른다거나 <악>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면 불교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누가 마른 똥막대기나 뜰 앞의 잣나무나 손가락을 믿고 의지하려고 하겠습니까?누가 몽둥이로 얻어 맞거나 '악'하고 외마디 소리를 듣고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불교에는 이런 선문선답식의 특이한 전통이 있어 왔기 때문에 부처님의 대한 정의를 한결 애매모호하게 만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그러나 이런 대화는 어디까지나 선문답이요,또한 인격적인 부처님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아니라 부처님의 근원인 불성에 대한 대화라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문답식이 아니라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 순수한 뜻으로"부처가 무엇이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복도 주시고 벌도 주시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분이다. 이렇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지요,부처님을 그렇게 표현한다면 틀린 말입니다.

부처님은 범어로는 붓다(Buddha)라고 합니다. 음으로 번역해서 불타.부도.부타 등 여러가지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붓다의 줄인말인 불(佛)이란 말을 가장 많이 씁니다. 뜻으로 번역해서 한자로는 각자(覺者)라고 하는데"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부처라고 하여왔고,우리 불자들은 존경하는 뜻으로'님'자를 붙여서 부처님이라고 불러 왔습니다.부처님이란 '불타'라는 범어가 변해서 된 부처에 '님'자를 붙인 말이지요.그런데 범어로 '붓다'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따라서 부처니이란 역시 '깨달으신 분'이란 뜻이 됩니다.

우리가 믿고 존경하고 받드는 우리의 신앙대상인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입니다.그러면 무엇을 깨달았느냐? 진리를 깨달으셨습니다.어떤 진리냐? 인생과 우주의 온갖 사물에 대한 참된 이치,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하는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부처님이라고하는 구체적인 대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합니다.곧 석가모니라고 하는 깨달으신 분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지요.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사실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면,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의 카피라국의 왕자로 출생하였으나,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해서,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6년간의 수행을 통해,마침내 일체의 번뇌를 끊고,인생과 우주의 참 진리를 깨달으시고 대해탈을 성취하신 뒤에, 중생을 위해 45년간 설법을 하시다가 세수 80세로 대열반에 드신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의 신과는 어떻게 다른가?

첫째, 다른 종교의 신은 실제로는 이 세상에 나타난 일이 없는 가공적인 존재인데 비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은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입니다.둘째로는 다른 종교의 신은 세상을 스스로 창조했다고 하는데 부처님은 창조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달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말하면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으셨다고 했는데,그 진리와 우리와는 어떤 상관이 있으며, 석가모니의 깨달음이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 문제도 생각해 보지않을수 없을 것입니다.다른 종교의 신은 사람을 만들었고 길흉화복을 주관한다고 하니까 좋든 싫든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지만 부처는 천지를 창조하거나 복을 주관하는 신도 아니고 단지 진리를 깨달으신 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분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하늘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우리 인생이 괴로움을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기 때문에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이고,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으신 지혜와 자비로 우리들을 행복한 삶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로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불교가 되었건 기독교가 되었건 종교를 갖는 목적이 무엇입니까?행복하게 살자는 것이 아닙니까? 불행해지자고 절에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불행하게 해달라고 불교를 믿는 사람이 있어요?있으면 어디 손 좀 들어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그렇습니다.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단지 바라는 바 행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를 갖는 목적은 행복추구에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이고득락(離苦得樂)입니다.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찾자는 것입니다.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자는 것이 목적입니다.그런데 문제는 방법입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그렇지요?

그 완전한 방법을 깨달으신 분은 역사상 오직 한 분 석가모니 부처님뿐입니다.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으신 행복의 비결을 혼자만 터득하시고 자기 혼자서만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떠나 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 길을 가르치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중생들로 하여금 전미개오(轉迷開悟)하도록 수없이 많은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는 곧 우리 중생들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비결을 배워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만일 부처님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중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시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무조건 행복하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부처님도 그런 신은 아닙니다.부처님이 우주의 대도를 깨닫고 보니 그런 신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낼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아무리 연지,곤지를 찍고 발라 아름답게 치장을 했다고 할지라도 마네킹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신에게 온갖 찬사와 온갖 장엄을 다 갖다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런 신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신은 한낱 강아지만도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깨치고 보니까 그런 신은 이 우주의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모두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었습니다.모든 생명체는 모두가 제 각각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이지 아무도 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런 진리를 깨닫고 중생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고 할지라도 현재는 이 세상에 부처님이 없는데 불교를 믿어서 무슨 효험이 있느냐? 다른 종교에서는 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데 부처는 신이 아니므로 살아있을때는 몰라도 지금은 죽고 없는데 믿어서 무엇하겠는가? 이런 의문은 갖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해 본 일 없습니까? 예수는 부활승천했다고 하지만 부처님이 부활승천했다는 말은 없지 않습니까?

사실 이 문제는 다른 종교인들이 불교를 죽은 종교라고 공격하는 구실이 되기도 합니다.그러나 역시 부처님을 잘못 아는데서 빚어진 오해에 불과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단지 32상과 80종호의 거룩한 몸매로써의 부처님만이 아니라 영원불멸,불생불멸,진리자체로서의 부처님이십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대승경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만 부처님은 열반하시면서도 단지 유형의 한시적(限時的)인 부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입멸에 드셨을 때 상수제자(上首弟子)인 가섭존자는 상당히 먼 곳에 있었습니다.그래서 입관한 뒤에야 부처님 곁으로 달려 왔는데,부처님의 임종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일이 못내 서러워서 관을 붙들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단단히 봉한 관 속에서 부처님의 두 발이 관을 뚫고 밖으고 쑥 내밀어졌습니다.이 일화를 곽시쌍부(廓示雙趺)라고 하는데,선종에서는 이를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곧 마음과 마음으로 법을 전했다는 증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시신의 발이 산 사람처럼 움직였다고 하는 이 설화의 진정한 뜻은 육신의 죽음이 곧 부처님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한 부처님의 법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가지의 몸이 있습니다.법신.보신.화신입니다. 법신(法身)은 '법의 몸'이란 뜻인데 영원불멸한 '진리의 본체'를 뜻합니다.이 법신은 단지 부처님만이 아니라 세상 만물의 근본으로 부처님은 법신불로서 이 세상에 상주하시는 것입니다.

삼신 가운데 석가모니라는 화신은 비록 이천오백여년전에 이 세상에서 육신의 모습을 버리셨지만 법신불은 우주법계에 상주하시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른 종교의 누구처럼 부활해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 기절초풍하게 하신 일은 없지만 이 세상 어디에나 항상 계시므로 우리는 그 법신의 부처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무엇이냐?또는 부처님은 누구신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정의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역사적인 부처님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누구시냐? 둘째는 법신의 부처님 즉 불성이 무엇이냐?

그러나 이 둘을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부처님은 석가모니라는 화신불로 2천6백여년 전에 이 세상에 나오셨고,열반하신 후에도 법신불로 우주 법계에 상주하시며,또한 중생들의 근기따라 천백억화신을 나투시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이 신봉하는 인격적인 부처님도 석가모니 부처님만 계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역사적인 부처님은 아니지만 아니타불이라든지 약사유리광여래불이라든지 미륵부처님이라든지 여러 부처님이 계십니다. 이 모든 부처님을 다함께 신봉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대상으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부처님에게는 공통적으로 두가지 덕이 있습니다.한문으로는 자각각타(自覺覺他)라고 하는 말인데,'자각'은 부처님이 진리를 깨들으심으로써 모든것을 통달한 대지혜를 성취하신 것을 말하고,'각타'란 부처님께서 중생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대자비심을 일컫는 말입니다.이 두가지 측면에서 부처님에 대한 정의를 내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완전한 지혜를 갖추시고,한량없는 자비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중생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입으로 부처님을 선전하는 것보다도 행동으로 포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우리 불자들 각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스스로 환희심이 일어나서 불교에 귀의하도록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포교는 없겠지요.

부처님은 있지도 않은 허무맹랑한 신이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으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행복한 삶을 갈도록 인돌하시는 분입니다.그러므로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를 몸소 생활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이웃에게는 부처님 노릇을 해야만 진정한 불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부처님이 되어 불국정토를 건설합시다. 성불하십시요!

나무 석가모니불!

불교설법연구원편 법천스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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