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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21 10:51
[출판/공연] <석전 박한영 >출간
 글쓴이 : 전수진기자
 

   

석전 박한영 스님의 탄생 150주년
임혜봉 스님이 석전 박한영 스님의
삶과 생애, 학문, 수행을 담담히 그린 평전!


“스님은 일제강점기 조선 제일의 불학강사(佛學講師)였을 뿐만 아니라 선(禪)에도 조예가 깊었고 당대의 뛰어난 시인·서화가·묵객들과 시회(詩會)에서 시를 지으신 시인이었다. 사람마다 삶이 힘들고 어렵기 마련이다. 힘겹게 인생을 사는 불자와 젊은이들이 그 어둡고 혼란했던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도 꿋꿋하게 학문과 수행에 정진했던 석전 큰스님의 전기를 읽고 삶의 어떤 긍정적인 실마리와 좋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머리말 중에서

올해는 석전 박한영 스님(1870∼1948)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구한말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석학 중의 한 분으로 손꼽히는 분이다.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근대 불교 교육의 선각자, 조선불교의 제일인자, 한국학의 태두(泰斗), 문사철의 석학, 근대 지성의 멘토 등 그 어떤 말로도 스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일제강점기 그 어둡고 힘든 시절을 밝게 비추어 준 큰 스승, 석전 박한영 스님은 한국불교 근대화의 문을 열었고, 해방 후 초대 종정으로 한국불교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였다. 수행력 깊은 박람강기의 석학으로 당대 지성인들을 이끌어 문화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석전 박한영』, 이 책은 『친일불교론』,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종정열전』 1·2, 『망국대신 송병준 평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의 친일불교인사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임혜봉 스님이 철저한 고증과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한 석전 박한영 스님의 평전이다.
석전 박한영 스님의 삶과 생애와 학문, 수행을 객관적으로 그려놓은 가운데 관련 사진도 곁들여 생생한 감동을 더해 준다.

‘문사철의 석학, 근대 지성의 멘토’ 『석전 박한영』!

“대원 강원에는 학인스님들 외에도 석전 스님의 심후한 학덕을 존경하고 따르는 재가 거사와 준수한 청년들이 모여 들었는데, 운성의 기억에 남는 이름으로는 김형태·김동리·이봉구·신석정·서정주·이종익 등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오래 전 일이라 기억할 수 없다고 하였다.”
- 본문 224쪽 중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은 근대 지성을 대표하는 고승이다. 1895년 순창 구암사에서 강의를 시작한 이래 광성의숙, 고등불교강숙, 개운사 불교전문강원 등 여러 사찰에서 강주로 있으면서 수많은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그뿐 아니라 중앙학림의 학장,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역시 많은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과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미당 서정주(徐廷柱, 1915~2000) 등 학계와 문학계에도 수많은 제자들을 남겼다. 육당과 위당은 당대의 5대 천재로 손꼽히는 석학이었는데, 이들은 석전 박한영 스님과 30여 년 동안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왔다.
당대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육당 최남선은 석전 스님의 한시(漢詩)를 모은 〈석전시초 石顚詩抄〉 발문에서, “석전사(師)를 만나매, 내전(內典)이고 외전(外典)이고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 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고백했다.
위당 정인보는 〈석전산인 소전(石顚山人 小傳)〉에서, “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를 가나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지 화제는 고갈될 줄 몰랐다.”고 술회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당대 저명한 시인 묵객들과 교류하면서 산벽시사(珊碧詩社)의 동인으로서 활발하게 시회(詩會) 활동을 하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이능화, 만암, 청담, 운허, 운성, 운기, 남곡, 경봉 스님 등 출가자들과 정인보, 오세창, 이동영, 이광수,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모윤숙, 김동리, 조종현, 김영수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도 모두 석전 스님의 제자이거나 혹은 깊은 학문적·인격적인 영향을 받았다. 박람강기의 석학인데다 친일 행적이 전무(全無)한 항일의 곧은 지조와 인격을 갖추었기에 석전 박한영 스님에게 수많은 당대 지성들이 감화되었던 것이다.

석전 박한영 스님의 항일 행적과 중생 사랑

“석전 박한영 스님은 불교계 개혁과 유신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훗날 시간적으로 촉박하여 석전을 민족대표로 내세우지 못했다고 해명했지만 (중략) 석전의 제자인 중앙학림 학생들이 대거 3.1운동의 전위대로 활동하였다.”
- 본문 118쪽

김법린, 김상헌, 백성욱, 정병헌, 오택언, 신상완, 김대용, 박학규, 김규헌, 김봉신 등 석전 박한영 스님에게 지도 받은 중앙학림의 학생스님들이 서울 시내 일원과 전국 각 지방의 사찰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운동을 분담하여 추진하였다. 이렇듯 중앙학림의 학생스님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가운데 석전 박한영 스님은 중앙학림의 전임 학장으로 선출되었고, 곧이어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와 대동단에 참여해 항일 운동 대열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성임시정부에서 배포한 국민대회 취지서의 말미에 첨부된 명단에 석전 박한영 스님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1921년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제출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 날인함으로써 항일 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하였다. 석전 박한영 스님이 조선불교의 일본 임제종과의 합병을 적극 반대한 것 역시 항일운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식민통치하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석전은 과감하게 임진왜란을 들먹이고 일본인들이 애써 기피하는 ‘이충무공·왜군·강강술래’라는 금기어를 사용하였다. 석전은 「명량(鳴梁)」이라는 시에서도 임진왜란 때의 일본군을 ‘비휴(??)’라는 사나운 동물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석전의 시 「명량」과 기행문 「영주기행」에 나오는 ‘명량해전’에 관한 대목을 보면 그가 비록 ‘방외(方外: 세속의 테 밖)’의 사람이었지만 투철한 역사의식과 강한 민족적 주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본문 166쪽~167쪽

이 책은 1부 석전의 출가와 구도, 2부 불교 유신과 항일 운동, 3부 기행시대, 4부 종정(교정)시대, 5부 만년의 물외도인 등 총 5부로 나뉘어 편집되어 있는데, 3부에는 춘원·가람과 금강산 여행, 제주도 기행, 육당과 풍악 기행, 눈 내리는 겨울, 남쪽지방 기행, 심춘 순례, 묘향산과 경주 여행, 백두산 등반 등 최남선, 이병기, 정인보 등과 함께 한라에서 백두까지 기행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의 명승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술술 써 내려 간 석전의 기행시를 음미하는 것도 이 책의 색다른 묘미다. 석전의 한시에는 위의 내용처럼 투철한 역사의식과 강한 민족적 주체성이 담겨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항일의식을 북돋워 주고 있다.

인재양성과 종단 발전에 힘쓴 근대 불교의 선각자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의 어렵고 힘든 시절에 살았던 석전 박한영 스님은 시대의 험난함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구도열정으로 일생을 시종하였다. 스님은 조선불교 선교 양종의 교정(1929)이자 개운사 조실이었으며 대원암 강원의 강주였던 시절에도 강원의 학인들과 똑같이 일찍 일어나 매일 새벽 좌선을 하고 학인들에게 강의를 한 후 20리 길을 걸어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출근하여 교장인데도 직접 『선문염송』과 유식학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뿐만 아니라 석전 박한영 스님은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여 불교학의 발전과 불교 유신에 큰 기여를 한 근대 불교의 선각자다. 스님은 강원과 불교전문학교의 교재로 편찬한 책이 여러 권이며, 인명학과 유식론을 비롯하여 『계학약전』·『대승백법』·『팔식규구』·『정선치문집설』·『선문염송 및 설화』 등 불교학의 이론서도 다수 출간하였다.
또한 『석전시초(石顚詩抄)』(동명사, 1940)에 석전 박한영 스님의 한시 598편이 수록되어 있다.(다른 사람의 시 6편을 합하면 총 604편). 이 시집은 육당 최남선이 석전 스님의 고희를 기념해 만들어드린 책으로 육당은 이 시집의 원판을 멀리 상해까지 가서 제작했다고 한다. 한시뿐만 아니라 여러 사찰의 상량문·중건비문·사리탑명·승려들의 영찬(影贊)과 행략(行略: 짧은 전기)들을 무려 64편이나 지었고, 석림 수필 또한 21편을 썼다.[스님의 산문은 『석천문초』(법보원, 1962)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난해하기로 유명한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을 연구하여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1931)을 완성해 출간하기도 하였다.
교계의 여러 잡지와 신문에 끊임없이 시와 산문을 써서 게재하였고, 『해동불보』라는 불교 잡지의 편집·발행인으로 매월 많은 글을 써서 발표한 것은 오로지 독자들을 깨우치기 위한 중생 사랑의 발로였다.

당대의 최고 지성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만큼 박학다식하고, 단 한 번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시종일관 일제에 항거했던 석전 박한영 스님,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삶의 의미와 바른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 석전 박한영 스님 약력 ◆

박한영 스님은 1870년 8월 완주군 초포면에서 태어났다. 불명(佛名)은 정호(鼎鎬), 호는 석전(石顚), 한영(漢永)은 그의 자(字)이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17세 때부터 마을 서당에서 훈장을 지냈다. 19세에 위봉사 금산 스님을 찾아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이때 정호(鼎鎬)라는 법명을 받고 3년 동안 위봉사에서 정진하였다.
21세 때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김환응(幻應) 스님으로부터 4교(四敎)를 배웠다. 23세 때는 순천 선암사로 가서 경전에 밝은 김경운(擎雲) 스님에게 대교를 배웠고, 우리나라 불교의 주맥인 선학과 화엄을 통달하고 내외군서를 섭렵한 설유(雪乳) 스님의 법을 이었다. 이로써 설파(雪坡 1707∼1791) 이후 조선불교 교학(敎學)의 커다란 산맥을 잇게 되었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만해(卍海)·금파(琴巴) 스님 등과 불교개혁에 나섰고 만해·성월(惺月)·진응(震應)·금봉(錦峯) 스님과 친일불교에 맞서 조선불교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임제종(臨濟宗)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고등불교강숙 숙사(1914), 중앙학림 강사와 교장(1915~1922), 중앙불전 교장(1930~1938)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조선불교 교정(敎正)을 지냈다.
석전은 1946년까지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과 조선불교 교정을 맡아 보며 불교계의 발전에 진력했다. 8·15 해방 후에는 조선불교 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었다. 불교계의 화엄종주로 불렸던 석전은 개운사에서 내려와 정읍 내장사에서 만년을 보내다 1948년 세수 79세로 입적했다.

석전 박한영 |임혜봉 지음|민족사 |값2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