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생물학의 토대가 된 모페르튀의 명저
국내 첫 소개
디드로의 반박문과 모페르튀의 재반박문도 수록”

[b판고전] 14권으로 근대 생물학의 토대가 된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의 ≪자연의 비너스≫가 나왔다. 18세기의 프랑스와 유럽의 사상과 문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었다. 물론 18세기 이전 사람들이 ‘인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전통의 유럽에서는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을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은 물음 자체가 반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다. [창세기]의 말 그대로 인간이란 신의 피조물이며, 모든 동물들을 지배할 권리를 받은 만물의 영장이며, 신이 부여한 이성을 가지고 무한하고 전능한 신을 깨닫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17세기의 과학혁명은 과학자와 신학자들로 하여금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성장하고, 또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지 하는 문제와 직면하게 만들었다. [성경]의 천지창조와 기적이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신앙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이론이 전성설이었다. 즉 지상의 모든 피조물이 천지창조 이래로 전혀 변화를 겪지 않았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위해 신이 일시에 창조한 최초의 모든 종들이 배아(胚芽) 안에 앞으로 무한히 태어날 수 있는 개체들을 무한히 포함하고 있다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종교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발생하게 되는 개체는 부모 중 한쪽에 이미 형성을 끝낸 채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가 부모 양쪽을 닮는 것이나 태어날 때 기형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물론, 피부색과 같은 종족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생명의 발생은 부모 양쪽의 공헌에 따른다. 애초에 완전히 형성된 개체는 존재하지 않고, 부모는 대단히 작은 유기 입자들을 교환함으로써 이들 입자가 나중에 한 개체로 자라날 아이의 여러 부분을 마련해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모페르튀의 이러한 입장은 바로 이 점에서 현대의 DNA 이론과 유전의 이론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모페르튀는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기형의 문제, 격세유전, 종의 개량은 물론 획득형질의 유전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페르튀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직 현대적 의미의 생물학(biology)이 탄생되기 이전으로, 생물학이라는 말은 19세기 초에 라마르크가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보편화되었다. 수학과 천문학자로서 자신의 이력을 시작했던 모페르튀는 영국 체류 중 뉴턴을 읽고 열렬한 뉴턴주의자가 되어 프랑스에 돌아왔다. 그는 당시 데카르트주의가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홀로 혁신적인 뉴턴주의를 프랑스에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데카르트주의 천문학자였던 카시니가 지구는 적도부분이 납작하다고 주장하자, 모페르튀는 뉴턴을 따라 지구의 극 부분이 납작하다고 반박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북극과 적도로 원정대가 조직되었고 모페르튀는 북극 원정대를 직접 이끌고 위도를 측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뉴턴과 모페르튀의 승리였다. 
 
하지만 모페르튀는 뉴턴의 만유인력이 천체뿐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입자들과 원자들에도 수미일관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천문학자였던 그가 자연사와 오늘날 생물학이라고 불리게 될 학문에 몰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까지 막연하게 이해되어 왔던 유전 문제와 기형 문제를 ≪자연의 비너스≫와 [자연의 체계.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에서 훌륭히 해결해내게 된다. 당시는 미래의 개체가 마치 번데기 속에서 잠자고 있는 나비처럼 고스란히 형성된 채 부모의 몸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자 괴물과 기형의 존재는 신이 내린 저주의 결과라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모페르튀의 ≪자연의 비너스≫와 같은 선구적인 저작이 없었다면, 19세기의 라마르크며, 생틸레르 부자며, 그리고 찰스 다윈의 발견도 늦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낡고도 오랜 문제는 모페르튀가 성취한 혁신적인 이론으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과 의미로 등장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참고로 ≪자연의 비너스≫에 주목한 디드로는 [자연의 체계: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이라는 글을 쓰고, 모페르튀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디드로 씨의 반박에 대한 답변]을 저술했는데, 본 번역서에서는 이 두 편의 글도 부록으로 수록하여 18세기 유럽 지성사의 중요한 한 장면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저자 :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

(Pierre Louis Moreau de Maupertuis 1698-1759)
프랑스 뉴턴주의 수학자. 과학아카데미 종신서기였던 퐁트넬과 극작가인 우다르 드 라모트와 교류하고, 탕생 부인(Mme de Tencin)의 살롱에 출입하면서 당대 문인들과 교류했다. 1728년에 런던에 6개월 동안 체류를 하면서 로열소사이어티에 입회, 이 시기에 뉴턴의 이론을 발견하고 열광적인 뉴턴주의자가 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주로 데카르트주의 기하학자들로 구성되었던 프랑스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그는 뉴턴주의의 입장에 서서 ≪천체의 다양한 모양에 대한 논고Discours sur les diff?rentes figures des astres≫(1732)를 출판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데카르트 기계론에 비판적이었던 모페르튀는 1744년 이후에 자연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기존의 지배적인 생명발생 이론이었던 전성설을 비판했다. ≪자연의 비너스≫(1745)와 ≪유기체 형성에 대한 시론≫(1754)은 모페르튀의 수학과 천문학의 입장을 수미일관하게 자연사에 적용하기 위한 시도로, 그는 이들 저작에서 후성설, 종의 변이, 기형의 발생 원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했다.      


역자 : 이충훈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파리 제4대학에서 ≪단순성과 구성: 루소와 디드로의 언어와 음악론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 프랑스학과 부교수이다. 디드로의 ≪미의 기원과 본성≫, ≪백과사전≫, ≪듣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농아에 대한 편지≫, 장 스타로뱅스키의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사드의 ≪규방철학≫ 등을 번역했고, ≪우리 시대의 레미제라블 읽기≫, ≪18세기 도시≫를 공동으로 펴냈다.




자연의 비너스 ㅣ 피에르 루이 모로 드 모페르튀 지음 | 이충훈 옮김 | 도서출판b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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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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